[취재 일기] 두번 우는 '신용불량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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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부와 여당은 지난달 신용불량 기록자 중 이미 연체금을 갚은 사람의 기록을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금융기관들은 잇따라 모여 해당자에 대한 은행연합회 자료를 지우기로 '자율적' 으로 결의했고, 정부는 "이 조치로 5월 2일부터 1백8만명이 다시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있다" 고 강조했다. 신용사회를 정착시키기 위해 신용불량자로 등재하는 연체금액과 기간을 까다롭게 한 등록기준을 시행한 지 불과 한달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조치가 시행된 2일부터 정부 발표만 믿고 다시 거래를 트려고 금융기관을 찾은 사면 대상자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부분 불량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어 대출이나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융기관이 고객과 거래할 때 은행연합회의 신용불량 기록만 조회하는 것이 아니다. 자체 거래기록에 신용정보회사에서 돈을 주고 사온 정보도 있으며 금융기관끼리 돌려보는 연체 정보도 보관돼 있다. 한 2금융권 관계자는 "한군데서 체크된 사람은 대부분 다른 기록에도 올라있다" 고 말했다.

은행연합회 기록을 없애더라도 다른 기록이 남아 있는 한 신용불량자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다는 사실을 정부는 과연 몰랐을까.

정부는 부랴부랴 현장 지도를 통해 신용불량 기록 삭제를 유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록 삭제를 강제할 근거가 없어 현장 지도 역시 먹혀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행 신용정보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는 '오래된 신용정보를 사유가 해소된 날부터 5년 이내에 삭제해야 한다' 고 규정돼 있다. 이 규정이 살아 있으므로 금융기관들은 "법규를 바꾸지 않는 한 무형의 재산인 신용정보를 5년 안에 삭제할 이유가 없다" 며 계속 보유할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정부는 신용불량자의 재활을 돕기 위해 잘 해달라고 요청했고, 금융기관은 자율이란 우산 아래서 기록을 없애기로 결의했지만 실제로 창구에선 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법규를 그대로 놓아둔 채 서둘러 기록 삭제를 발표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삶이 고단한 신용불량자들만 헛물을 켠 셈이 되고 말았다.

경제부=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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