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쌀 저온저장 하니, 1년 지나도 햅쌀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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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15일 오후 경남 김해시 상동면 대감리의 미곡종합처리장(RPC) 피앤라이스(PN Rice). 껍질이 벗겨져 하얗게 도정된 쌀이 기계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벼를 건조해 저장한 뒤 쌀로 가공·포장·판매하는 여느 RPC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농림수산식품부가 꼽은 국내 대표적혁신 RPC라는 사실을 확인하기까지 그리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선 예사롭지 않은 쌀 포대가 눈에 들어왔다. 떨어지는 쌀을 담아 자동 포장하는 5㎏ 들이 쌀 포대에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중앙포토>
“잘 찢어지지 않는 특수 한지를 쓰고, 개봉후 다시 밀봉할 수 있게 지퍼를 달았어요. 별도의 쌀통 없이도 쌀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지요.” 이 회사 나준순(55·사진) 대표의 설명. 가공과 물류 혁신의 국내 선두주자 답게 좀 더 맛있는 쌀 제품을 만들어 내려는실험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앙통제실에 가 봤다. 쌀의 상태와 맛을 검사하는 완전미 검사기, 투명도 검사기, 식미분석기 같은 기계가 가득했다. 완전미 검사기는 완전한 상태의 쌀 비율을, 식미분석기는 쌀의 맛을 확인하고 등급을 검사한다. 나 대표가 오래 전 일본에서 도입한 것들이다. 하얀 쌀가루가 풀풀 날리고 특유의 눅눅한 냄새를 풍기던 옛 시골의 정미소와는 딴판이다. 이병길(47) 팀장은 “수분 15~16%,완전한 형태의 쌀 비율 95% 이상, 싸라기3% 이하, 색깔 있는 쌀 0%의 기준을 맞추지못하면 출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남 김해시 삼동면 대감리에 있는 피앤라이스의 벼 저장시설. [송봉근 기자]

쌀의 품질이 벼 품종이나 재배기술에 좌우된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나 대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쌀의 가공과 유통 과정을 잘 하면 훨씬 좋은 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에서 나온 것이 바로 ‘5℃ 이온쌀’이다. 벼를 섭씨 0~15도의 저온에서 저장하고, 이온수로 씻어 세균을 억제한 쌀이다. 1999년 출시됐지만 품질 경쟁력을 유지해 아직도 일반 쌀보다 15~20% 비싸게 팔린다.

‘완벽한 쌀’을 출시하기 위한 피앤라이스의 각종 장비들. 백도측정기(쌀투명도 검사기·사진 위), 완전립검사기(가운데), 미립식미계(쌀단맛측정기·아래).

 처음엔 시간이 지나도 어떻게 하면 햅쌀로 지은 밥맛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역시 경험은 무서웠다. 나 대표는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군산수산대를 졸업하고 젊은 시절 7년간 외항선을 탔다. 그때 채소나고기·과일을 반년~1년씩 보관하려고 저장고 온도를 칸마다 달리했던 기억이 났다. 즉시 김해 인제대 식품과학부에 의뢰해 벼를 섭씨 0~15도로 저온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벼 저장시설인 사일로(Silo)가 지름 9~13m, 높이 15~30m로 커 부분 온도를 섭씨 5도까지 낮춰야 했다. 벼를 1년 가까이 저온 저장한 결과 미생물이 잘 번식하지 못하고, 산화(酸化) 현상이 줄어 묵은 쌀도 금세 수확한 것처럼 밥맛이 좋았다. 이 쌀을 이온수로 두 번 씻어 보니 세균이 일반 쌀의 13%로 확 줄었다. 이후 미곡 업계에 회자된 ‘5℃이온쌀’의 탄생이었다. “정미소 주인이 대학교정을 들락거리고 공장에 실험실과 첨단장비를 들여오자 처음엔 미쳤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이 방식을 일반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대형 사일로의 온도를 낮추려면 중소업체로선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 대표는 또 한번 아이디어를 냈다. 도로가 새로 뚫려 버려진 터널을 저장고로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역시 맞장구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밀어붙였다. 관계 당국에 터널 사용허가를 얻어 말끔히 청소를 한 뒤 습기조절기를 달았다. 결과는 50% 비용절감이라는 대성공으로 나타났다. 이 방식은 아직도 김해 진례면 청천리지역 등에서 활용된다.

 나 대표의 연구와 혁신은 요즘도 멈출 줄모른다. 쌀의 진공포장법이라든지, 손잡이달린 특수 한지 포장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최근엔 쌀 표면에 대나무 추출물을 코팅한 ‘항동맥경화 쌀’ 같은 기능성 쌀을 개발 중이다. 몸소 경작을 하지는 않지만 재료에 신경을 많이 쓴다. 쌀의 품질을 위해 김해 일대 농민들과 계약해 연간 1만4000t의 좋은 벼를 수매한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피앤라이스는 직원 규모(6명)에 비해 큰 매출(연200억원 이상)을 올리는 국내 대표적 고부가가치 미곡처리장으로 컸다. 나 대표는 “쌀은 일단 시장에 나오면 누구든지 사서 먹을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쌀의 품질을 망친다.

시장개방 시대에 농민이든 유통업자든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우리 쌀의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 딸(26)이 이 회사에서 관리팀장으로 일한다.

글=김해=황선윤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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