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up] 최태원 SK 회장의 대 이은 ‘실패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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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에 실패하면 책임자가 (회사를) 떠난다는 식이 되면 아무도 도전을 안 한다. 실패할 일은 아예 안 만들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게 그런 사람이냐.”

SK그룹 최태원(50·얼굴) 회장의 말이다. 그룹 관계자가 21일 “요즘 들어 실패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며 전한 얘기다. SK그룹의 두 축인 에너지와 텔레콤은 성장에 정체를 맞고 있다. 최 회장이 “실패해도 좋으니 끊임없이 트라이(시도)하라”며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룹 관계자는 “최 회장의 말에는 실패를 딛고 과감한 투자로 성과를 올린 해외 자원개발 사업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SK에너지는 지난해 영업이익의 37%인 3352억원을 석유개발에서 올렸다. 이 사업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가 채 안 된다. 반면 매출의 68%인 정유사업은 349억원의 영업이익밖에 내지 못했다.

최태원 회장의 ‘실패론’은 아버지인 고(故) 최종현 회장에게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SK는 1983년 처음으로 참여한 인도네시아 카리문 광구 개발에서 실패를 경험했다. 89년엔 미얀마 블록C 광구의 단독 개발에 나섰다가 5년여 동안 약 6000만 달러를 날리기도 했다. SK에너지의 전신인 SK㈜의 한 해 순이익에 해당하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하지만 당시 최종현 회장은 책임을 묻지 않았다. 미얀마 사업에 참여했던 SK C&C의 정보기술(IT) 서비스 사업 총괄인 정철길 사장은 “최종현 회장은 실패의 원인을 연구해 회사의 자산으로 삼도록 했다”며 “관련 직원들은 책임 추궁은커녕 되레 대부분 특진까지 했다”고 말했다.

SK는 해외 석유개발에 나선 지 20년 만인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최태원 회장은 이후 자원개발 투자를 확 늘렸다. 2004년 650억원 선이던 관련 투자는 연 4000억~5000억원으로 확대됐다. 전문인력도 10여 명에서 100여 명으로 늘었다. 성과는 생각보다 컸다. 원유 기준으로 SK가 확보한 자원은 6년 새 3억 배럴에서 5억2000만 배럴로 늘었다.  

유가를 배럴당 80달러로 단순 계산하면 약 47조원어치의 해외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재계 6위인 롯데그룹의 자산 규모(48조8900억원)와 비슷한 액수다.

그룹 사람들은 “최 회장이 실패의 경험을 강조하는 데는 본인의 청년 시절이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 회장은 미국 시카고대 유학을 마치고, 1989년부터 1년 반 동안 미국 실리콘밸리의 작은 컴퓨터 회사에서 세일즈를 했다. 집에도 못 가고 출장을 다닌 날이 부지기수였지만 실패로 좌절한 날이 많았다. 그는 SK의 신입사원들에게 이따금 당시 경험을 들려준다. “(성과가 나든 안 나든) 당시 300개가 넘는 실리콘밸리의 관련 업체를 모두 방문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실천했다”며 “이때의 경험이 귀국 후 SK의 이동통신사업 구상에 많은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그룹 내에선 최 회장의 ‘실패론’에 동의하는 목소리가 많다. 하지만 우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회사 관계자는 “자원개발은 성공률이 5% 정도에 불과한 사업”이라며 “꼼꼼히 검토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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