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공간1번지] 해운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바다는 늘 어머니다. 지나고 나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쾌락의 먼 길로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온 탕아처럼 지친 정신으로 찾아들면 바다는 늘 따뜻한 말씀과 편안한 손길로 고단한 삶을 위무(慰撫)한다.

사춘(思春)의 그 처절했고 광포(狂暴)했던 욕망도 그곳에서 잠재웠고 거칠었던 생각의 줄기도 거기에서 다듬었다. 몇차례 청춘(靑春)의 쓰라렸던 패배도 거짓말처럼 잊을 수 있었고 그 뒤에 그림자처럼 따르던 자신에 대한 분노도 그곳에서 삭였다.

그 뿐이랴. 바다는 그 어떤 탕아의 죄도 씻어주었다. 부끄러웠던 온갖 일들을, 떳떳하지 못해 감추고만 싶었던 온갖 잘못들을, 스스로의 질책에도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오르던 지우고만 싶었던 기억들을 그곳에서 망각의 깊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히고 돌아서곤 했다.

그러고 나면 돌아오는 길은, 저 환장할 것만 같았던 추한 욕망에서 벗어나 정화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그래서 늘 바다를 찾았다. 미리 예정된 여행이 아니었다. 어느 밤 우연한 결단으로 감행되는 탈옥(脫獄)같은 것이었다. 가끔 묶여 있던 일상(日常)의 족쇄를 자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차를 몰고 어두운 길을 달리면서, 혹은 기차와 버스의 구석에 박혀 잠들지 못하면서 먼 인가(人家)의 불빛들을 헤아리며 바다로 가는 길은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신선했다. 돌아보면 까마득히 멀어져 있는 도회는 황폐하였다. 그곳의 환한 가로등과 네온 불빛에 빛나던 부(富)와 명예, 권력과 법률(法律), 그리고 그것들에 둘러싸인 정의(正義)는 왜소하고 왜소하여 버려도 좋을 티끌처럼 보였다.

그때쯤 비로소 밤의 긴 터널을 지나 바닷가에 닿았다. 서서히 드러나는 수평선은 이제껏 그어 왔던 선들과 그 선들로 이루어진 구획들이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말한다.

끝없이 뿌려져 있는 모래들은, 내가 다투었던 선(善)과 악(惡)을 가르는 잣대들이 완강하고 튼튼한 바위가 아니라 언젠가는 깨어지고 부서져 그냥 파도에 씻기는 저 모래알보다도 못한 잘디잔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알게 한다.

그렇다. 바다는 어머니였고 스승이었다. 그곳은 모든 것이 충만했고 또 모든 것이 비어 있다. 어떤 것이든 다 품어주었고 다시 모든 것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바다는 고향이다. 누군들 바다에 대한 향수(鄕愁)같은 감정이 없으랴. 그러나 나처럼 고향을 잃은 사람에게는 그 향수가 더욱 강하다.

그렇다.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지도 위에는 멀쩡한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지만 이미 내 가슴에 고향은 거의 다 사라지고 작은 부스러기로 남아있을 뿐이다. 배.사과.복숭아가 열리던 넓은 과수원과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먼지 풀풀 날리던 신작로.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흔들리던 시골길. 그 시절 어느 시골이든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참으로 문명의 불빛은 보기 힘들었으나 인정이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학교로 가는 길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일년에 한두 차례 운이 좋으면 먼바다에서 호기심으로 뭍 가까이 놀러온 고래들이 뿜어올리는 물줄기도 볼 수 있었다.

외갓집도 바닷가에 있었다. 태화강 맑은 물이 흘러드는 한적한 포구(浦口)였던 그 곳은 우리 마을보다도 더욱 문명에서 벗어나 있었다. 전기는 끝내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로 밤을 밝히는 외진 곳이었으나 강끝에서 쉬 잡혀드는 꼬시래기를 회쳐 먹는 도락을 일찍 배웠다.

그러나 그런 고향은 사라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 정유공장이 들어서고 학교는 천막교실로 옮겨졌다. 중학생이 돼 부산으로 유학(遊學)을 떠나기 전 과수원도 헐리기 시작했다.

외갓집이 있던 어촌에는 비료 공장과 알루미늄 공장이, 강건너 산너머엔 조선소들이 들어섰다. 낯선 사람들이 몰려왔고 토박이들은 하나 둘 읍내로 갔거나 더 큰 도시로 떠났다. 아카시아 꽃내음도, 코스모스도, 먼지 날리던 신작로도 그곳엔 없다.

유년(幼年)의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바뀔 때쯤 나는 부산으로 떠났다. 중학교.고등학교를 하숙집 좁은 방에서 보내면서 나는 고향을 조금씩 잊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또다른 바다를 만났다. 교정의 벤치에서도, 그리움을 가득 싣고 떠나는 외항선은 어느 날이든 볼 수 있었다. 맑은 날이면 오륙도 너머 대마도까지 보인다며 교실 창가에서 목을 빼곤 하면서 가물가물 돌아오는 배들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니체와 키에르케고르를 읽던 시절이었다. 랭보의 '만취선' 과 엘리어트의 '황무지' 를 외우면서 한 줄의 습작(習作)을 위해 밤을 하얗게 새우곤 하던 문학도였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청마(靑馬.유치환의 호)의 '파도' 를 격정으로 외쳐부르면, 그때 막 눈떴던 첫사랑의 비극적 결말에 대한 예감도 그저 낭만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좋았다.

그 바다가 해운대였다. 지금은 상점과 유흥가로 덮였지만 그때는 해수욕장이 개장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한적한 바닷가였다. 백사장은 발자국들로 어지럽지 않았고, 동백나무와 송림(松林)으로 우거진 동백섬에 숨어드는 젊은 연인들도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토 요일이면 나는 해운대를 찾았다. 초량에서 버스를 타면 수영비행장이 있는 벌판을 지나 종점에서 내려주었다. 거기서 한참 걸어 들어가면 바다가 있었다. 그곳에서 내 뼈는 굵어졌다. 정신도 그 곳에서 여물었고 야망이랄 것도 없는 생(生)의 목표도 그곳에서 설계하였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더 큰 도회인 서울로 온 뒤에도 그 바다를 잊지 못했다. 재수(再修)에서 시작된 몇차례 세속적 실패에서도 더 깊은 웅덩이로 빠지지 않게 한 희망의 원천(源泉)은 그 바다였다.

철이 들어 온갖 욕망에 때를 묻힌 뒤로는 자주 그 바다를 잊고 지내지만 아직도 문득 미치도록 그리울 때면 만사를 버리고 그 곳으로 간다.

마치 귀소(歸巢)하는 심정으로 간다. 혹은 정신을 세탁한다는 구실을 스스로에게 대기도 하지만 바다는 그런 사치조차도 기꺼이 받아준다. 까마득한 학창 시절처럼 달빛은 아직도 창백하고 창백하여 푸르다.

바다에서 돌아오면 잃었던 시(詩)라는 애인을 다시 부둥켜 안는다. 파도소리와 흰 포말(泡沫)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숨가쁜 도회의 일상을 산다. 그래서 바다는 내게 어머니다. 내게는 고향이다. 바다는, 내게는 시(詩)다.

전원책 <변호사.시인>

사진=송봉근 기자

<약 력>

▶1955년, 울산 출생

▶부산중.고 경희대 법대

▶77년 한국문학신인상

▶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SBS 자문변호사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시집 『슬픔에 관한 견해』

『나에게 정부는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