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럴림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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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호 33면

독일의 브레슬라우 유대병원에서 일하던 신경과 전문의 루트비히 구트만(1899~1980년) 박사는 1939년 나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자신을 받아 준 나라에 도움을 줄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영국 정부에 건의해 런던 인근의 스토크 맨드빌 병원에 국립척수손상센터를 세우게 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싸우다 척수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된 상이군인들의 치료와 재활을 연구하기 위한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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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트만 박사는 척수 손상의 가장 좋은 재활치료법으로 스포츠를 권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상이용사들에게 휠체어를 타고 속도 경기를 하거나 야외에서 햇볕을 쬐면서 공놀이를 즐기게 했다. 그가 적용한 스포츠 재활요법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우선 육체적 운동으로 근육을 강화해 활동력을 높여 줬다. 여기에 여러 사람과 경쟁하고 경기를 즐기면서 성격이 쾌활해지고, 같이 땀 흘리며 친구를 사귀면서 사회성과 협동성이 높아졌다. 아울러 성취감을 주면서 자신감과 자존심을 갖게 해 줬다. 스포츠를 통한 몸과 마음의 치유 효과다.

제2차 세계대전 뒤 그는 영국군 척수 손상 상이용사를 대상으로 스토크 맨드빌 병원에서 스포츠 대회를 열었다. 전후 처음 열린 올림픽인 48년 런던 대회에 맞춰 행사를 개최했다. 작은 운동회 규모였던 이 대회는 최초의 척수 손상 장애인 스포츠 대회로 통한다. ‘스토크 맨드빌 경기대회’라고 불린 이 연례 대회는 52년 네덜란드군 척수 손상 상이용사들이 동참하면서 국제대회가 됐다. 최초의 장애인 국제 스포츠 행사다.

이 공로로 구트만 박사는 56년 올림픽 정신을 구현하는 데 힘쓴 사람에게 주는 피언리컵을 수상했다. 나중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에게 기사 작위를 주면서 공로를 치하했다.

이 대회는 그 뒤 진짜 올림픽으로 자라났다. 60년 로마 대회를 시작으로 국제행사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4년에 한 차례, 올림픽과 같은 해에 열리기 시작했다. 상이군인이 아닌 민간인 척수장애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이 대회를 제1회 패럴림픽으로 친다. 패럴림픽은 76년 토론토 대회부터 척수 손상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장애인이 참가하는 국제행사로 진화했다(별도의 척수 손상 장애인 국제대회도 존속하고 있다). 겨울 패럴림픽도 이때부터 열리고 있다. 88년 서울 올림픽부터는 올림픽 개최 도시에서 여는 것을 공식화했다. 올림픽의 쌍둥이 행사로 승격한 것이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겨울 패럴림픽이 21일(현지시간) 폐막한다. 44개국 506명의 선수가 참가해 64종의 경기를 치렀다. 재활병원 운동장에서 처음 열렸던 작은 행사가 이제는 세계적 대회로 성장했다.

구트만은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참가자들의 성과이지 그들의 장애가 아니다”고 말했다. 얼마나 불편한지가 아니라 얼마나 노력하고 극복했는지에 주목해 달라는 메시지다. 패럴림픽이 ‘운동 속의 정신’을 모토로 삼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모든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패럴림픽도 참가자 모두가 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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