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문화] 합창 붐 이는 프랑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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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층이 주축인 아마추어 합창단 ‘아코르’ 회원들이 노래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 20일 오후 10시 파리 남부 외곽도시 클라마르의 음악예술학교 연습실. 50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40여명의 남녀가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합창연습을 하고 있었다. 기자가 연습실로 들어서자 단원 한 사람이 "이곳에 오는 사람이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미소 띤 얼굴로 악보를 쑥 내밀었다. 로시니의 미사곡으로 60쪽은 족히 돼 보이는 '대작'이었다. 존경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자 "지난번 연주회 때는 베토벤과 멘델스존을 불렀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코르(화음이란 뜻)란 이름의 이 합창단은 단원 대부분이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층이다. 이들은 직장에서 퇴근한 뒤 노래가 좋아 모여든 아마추어 음악애호가들이다. 교수.엔지니어.간호사 등 직업도 다양하고 최고령자인 67세 단원을 포함, 은퇴한 사람들도 제법 된다. 아코르의 단장 파스칼 르마오(47.고교 교사)는 "직업음악인은 장소를 빌려준 클라마르 음악예술학교 교수인 지휘자와 반주자 두 사람 뿐"이라고 말했다.

르마오 단장은 "2년에 세번꼴로 발표회를 하는데 다음달 19일 연주회를 앞두고 지금 마지막 강행군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후 8시30분부터 시작된 연습은 오후 10시30분을 넘겨서야 끝났다.

요즘 프랑스에는 '합창 붐'이 일고 있다. 아마추어 합창단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올 들어 많이 늘었고, 새로운 합창단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합창 발표회도 크게 늘었다.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에 따르면 현재 프랑스 전역에서 각종 아마추어 합창단에 소속돼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30여만명이나 된다. 르 피가로는 직장.양로원.학교.교회.마을 단위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든 노래부르는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고 전했다. 지난 22일 발행된 잡지 마담 피가로도 "합창이 프랑스 사람들이 선호하는 문화활동으로 자리 잡았다"며 "기업들 중에는 조직의 기를 살리기 위해 지휘자를 고용하는 곳도 있다"고 보도했다.

의사들도 "건강에 좋다"며 노래 부르기를 권장하고 있다. 교육심리학자이자 심리치료 의사인 자크 본옴므는 "노래는 에너지원이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데도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올 들어 갑자기 합창 바람이 거세진 데는 프랑스인들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예술영화 '합창단원'(크리스토프 바라티에 감독, 제라르 쥐뇨 주연)의 영향이 컸다. 지난 3월 개봉한 이후 9월 초까지 750만명 이상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최근 출시된 DVD도 인기다.

영화 '합창단원'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 남부도시 마르세유의 한 학교 기숙사를 배경으로 찍은 것이다. 전쟁이 수마처럼 할퀴고 지나간 도시의 절망 속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기숙사에 수용된 가난한 어린 학생들은 엄한 교육을 받으며 희망 없는 기계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온 한 교사로 인해 이 기숙사는 180도 바뀌는 체험을 한다. 교사는 노래로 학생들에게 사랑을 가르친다. 합창을 하면서 아이들의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은 서서히 열리고, 절망은 서서히 희망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학교가 변하고, 이들의 공연으로 마을 사람들까지 감동받아 마을 전체가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찬 삶을 누리게 된다는 줄거리다.

이 영화를 본 한 교민은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요즘 영화와는 달리 오랜만에 프랑스 사회를 순수함에 흠뻑 젖게 만들어준 감동적인 영화"라고 말했다. 영화 배경이 된 곳은 관광명소가 됐고, 영화에 출연한 합창단원들은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다음달 파리에서 영화처럼 공연할 예정이다.

클라마르(프랑스)=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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