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 ‘야생형 인재’로 뽑힌 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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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왼쪽부터 최윤정·김현중·김건우·이한나씨. 다양한 경력을 자랑하는 SK텔레콤의 올해 신입사원들이다. ‘야생형 인재’에 걸맞은 포즈를 취했다. [김태성 기자]

컴퓨터 판매, 쇼핑몰 운영, 대리운전·주차 기사, 새벽 손세차, 호프집 주인….

지난 1월 SK텔레콤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김현중(28)씨의 인생 역정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비·생활비를 벌려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생계형 근로에 매몰되지만은 않았다. 대학 4학년 땐 하루 네 시간 자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다섯 달간 세계일주를 떠났다. 부족한 여행경비를 벌충하려고 캐나다 체리농장에서 20여 일간 중노동을 하기도 했다. 캐나디안 로키산맥에선 숙박비가 없어 7박8일 중 6일을 길에서 잤다. 귀국 여비는 필리핀에서 여행 가이드로 벌었다. 4년 평균 학점은 4.5 만점에 3.38점이고, 토익 성적은 없다. 요즘 취업의 필수자격인 ‘좋은 스펙(학벌·학점·영어 등)’과는 꽤 거리가 있다.

하지만 때마침 ‘야생형 인재’를 찾는 이 회사와 궁합이 맞아 100대 1의 입사경쟁을 뚫는 행운을 누렸다. 국내 이동통신 1위인 이 회사의 정만원 대표는 “정체된 국내외 통신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하는 마당에 도서관에서 점수 쌓는 데 골몰한 ‘온실형’ 인재만으로는 힘들다”고 강조해 왔다.

◆경험이 중요하다=SK텔레콤은 그간 서울 명문대에 집중했던 캠퍼스 방문 취업설명회를 지난해 지방대학으로 확대했다. 서류전형에서 여섯 가지 질문을 주고 각 질문에 2000글자 이상 답하도록 했다. 가장 눈여겨 본 건 ‘체험’이었다. ‘포부’는 포장만 그럴듯할 수 있지만 체험은 아니다. 1만여 명이 낸 원서 총 6만여 장을 직원 40여 명이 일주일간 꼼꼼히 읽어보고 2200건을 추렸다. 인성·적성·영어 시험을 거쳐 1차 시험인 1박2일 합숙에 참가한 사람은 500여 명으로 다시 줄었다. 여기서 다시 200명을 뽑아 임원 면접을 했다. 임원 셋이 지원자 1명을 20분 이상 만났다. 솔직한 소통이 되는 데 힘썼다. “자, 외워온 건 놔 두고 이제부터 편하게 합시다”라고 다독였다. 업무 관련 지식보다는 살면서 경험한 것,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등을 물었다.

마케팅·전략·인사·법무·글로벌 등 9개 직군별 모집 관행도 이번에 깼다. 기술·경영직 둘로만 나눴다. 인력관리팀의 김성탄 매니저는 “스펙보다 가능성을 보기 위해 심사위원들이 선입견을 배제하는 데 힘썼다”고 전했다. 이번에 입사한 최윤정(26)씨는 “내 약점보다 장점을 찾아내려는 질문 방향이 반가웠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난해 12월 신입사원 105명이 선발됐다. 연령대는 24~32세로 폭넓고, 출신 대학 분포도 지방대까지 다양해졌다. 벤처회사를 운영해 봤거나 특허를 7개 출원한 엔지니어, 아프가니스탄 파병부대에서 군복무한 사람, 야간교사 활동 등 이색 경력의 소유자들이 대거 입사했다. 이른바 ‘스카이(SKY, 서울·연세·고려) 대학’과 KAIST·포스텍 출신 비중은 줄었다.

◆주인정신과 패기=야생형 인재를 풀어보면 ‘주인정신을 갖고, 어떤 일이 주어져도 열정을 바탕으로, 끝까지 일과 싸워 이기는 패기 있는 인재’다. 숙명여대 재학 시절 응원단장을 한 이한나(24)씨는 학창 시절 비 때문에 취소될 뻔한 행사를 자기 고집으로 살린 경험을 이야기했다. 동국대 영화영상학과를 나온 김건우(28)씨는 학교 기말고사와 영화 촬영이 겹쳤을 때 시험 대신 일을 선택했다. “제가 감독을 맡았는데 저만 쳐다보는 스태프가 10명이 넘었어요. F 학점을 받더라도 촬영을 미룰 수는 없었지요.” 영화를 찍으려면 재원이나 촬영 장소 마련 등 남에게 사정해야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경험을 학창 시절 4년 내내 했다.

연세대에서 전기전자를 공부한 최윤정씨는 2007년 공군 에어쇼에 참가해 훈련기 T-50을 처음 탑승한 민간인 넷 중 하나다. 대학 3학년 때 문득 ‘공부를 잘하지만 앞으로 잘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갤러리 큐레이터, 방송 리포터, 김연아 선수 팬클럽 등 하고 싶은 일들을 실컷 했다. “덕분에 학사경고를 맞기도 했다”며 웃었다.

1월 4일부터 8주간 신입사원 연수를 받은 이들은 업무향상교육(OJD) 후 다음달 1일 현업에 배치된다. 본지와 인터뷰한 이들 네 명은 “연수기간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난 못한다고 빼는 사람이 100여 명 입사 동기 중에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특강에 불려온 외부 인사들도 “내 강사 경험 중 이런 우레와 같은 박수는 처음”이라고 좋아했다 한다. 2월 21일부터 2박3일 동안엔 경기도 이천에서 서울 을지로 본사까지 ‘극세척도(克世拓道·세상을 극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라는 험한 대장정을 해내기도 했다.

‘야생 인재’답게 이들의 인생관은 씩씩했다. “우리는 스펙이 아니라 인생을 쌓아왔다” “겁나도 하는 것이 용기다” “실패해도 경험이 남는다”….

김태영 인력팀장은 “여러 해 신입사원을 뽑아봤더니 스펙과 학벌이 반드시 업무 능력과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다. 내년부터는 영어 시험도 없앨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 측은 신입사원들이 SK텔레콤 기업문화에 더 큰 활기를 불어넣길 기대한다.

글=박혜민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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