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후 2시였다. “법정 스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갔다. 방문객을 막는 보안은 철저했다. 병실에 들어갔다. 법정 스님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앙상한 팔과 앙상한 다리, 산소마스크를 댄 호흡을 따라 몸 전체가 들썩들썩했다. 무척 힘겨워 보였다. 법정 스님은 눈을 뜨고 있었다. 곁에 있던 상좌 스님은 “흔들리는 필체로 필담은 나누신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은 주위 사람이 말을 건네면 고개는 끄덕였다.
병원에선 “얼마 안 남으셨다. 절에서 임종을 맞을 거면 모시고 가라”고 했다. 상좌 스님들이 “불일암으로 가시자”고 말씀을 드렸다.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불일암은 수행하는 곳이다. 이 몸으로 가진 않겠다. 내가 다시 수행할 수 있는 몸이라면 그곳으로 가겠다.” 법정 스님은 그렇게 꼿꼿하고, 철저했다.
11일 오후 1시였다. “법정 스님이 병원에서 길상사로 이동 중”이란 제보가 날아왔다. 급하게 길상사로 갔다. 일주문 뒤로 길상사 신도 50여 명이 두 줄로 서 있었다. 다들 합장한 채 법정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구급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들어왔다. 신도들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상좌 스님들과 의료진이 차에서 법정 스님을 내렸다. 이동식 침대 위에 링거를 꽂고 누운 법정 스님은 행지실(주지실)까지 50m 가량 이동했다.
취재진도 없었고, 방송사 카메라도 없었다. 카메라를 꺼내 혼자서 찍었다. 봄·가을로 법문을 전하던 법정 스님과 길상사 신도들의 ‘마지막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앞을 지나자 신도들은 합장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행지실로 들어간 법정 스님은 40분 후에 입적했다. 길상사의 종루가 길게 울었다. 종소리를 들은 신도들은 오열했다. 이유가 뭘까.
12일 오전 11시20분이었다. 길상사 언덕의 행지실에서 운구가 나왔다. 8000여 추모객이 길상사를 가득 메웠다. 수사복을 입은 외국인 가톨릭 수사도 보였고, 수녀도 보였고, 원불교 교무도 보였다. 드러나지 않은 추모객 중에는 천주교인도, 개신교인도, 원불교인도 꽤 있을 것으로 보였다. 종교의 문턱을 넘나드는 추모의 울음, 이유가 뭘까.
13일 1만5000여 추모객들이 법정 스님의 다비식을 지켜봤다. 나무 사이로 고개를 쭉 빼서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얼굴마다 슬픔이 어려 있다. [신인섭 기자]
사실 법정 스님은 작가의 감수성, 예술가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봤다. 그래서 그는 이 시대의 ‘문학승(文學僧)’이기도 하다. 어려운 불교적 메시지, 난해한 옛 선사의 가르침은 그의 감수성을 통과하며 일상의 언어로 되살아났다. 이건 한국불교가 뼈 속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나는 깨달압네”하며 쏟아내는 한자 투성이의 ‘난수표 법어’가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을까. 누구나의 일상을 통해 풀어내지 못하는 법어는 또 얼마나 공허한 건가. 상대의 가슴을 열어 젖히지 못하는 법문은 결코 메시지를 전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없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