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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카페서 요즘 ‘판’이 벌어진다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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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2일 오후 10시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한 보드게임 카페. 20~30대로 보이는 남성 10여 명이 포커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칩을 쌓아놓고 ‘와, 대박이다’고 소리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도박장이었다. 카지노와 같은 딜러는 없었지만 화투판에서처럼 돈이 오고 갔다. 서너 명씩 모여 앉은 근처 테이블들도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기자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아 ‘보드게임을 하고 싶다’고 하자 종업원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게임 방법을 설명해 줄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다. 원래 보드게임 카페에서는 종업원이 블루마블, 루비큐브 등의 게임을 하는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무슨 게임을 하느냐’고 묻자 “요즘 90% 이상의 손님들은 카드를 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1년여 전부터 손님들이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보드게임을 하겠다고 하자 종업원은 마지못해 게임 도구와 설명서를 갖다 줬다. 설명서는 독일어로 돼 있어 해독이 불가능했다.

1990년대 선풍적 인기를 몰고 왔던 보드게임 카페가 도박장으로 바뀌고 있다. 대학가 주변에서 머리를 쓰는 놀이공간으로 시작한 보드게임 카페가 사행산업으로 전락한 것이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 이외에 신촌·홍대·대학로 일대 수십 곳의 보드게임 카페도 모두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거나 도박 등 사행성 게임으로 연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데오 거리의 또 다른 보드게임 카페에서 포커를 하던 서모(28)씨는 “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며 “정산은 두 시간에 한 번 하기도 하고, 잘 아는 사이일 경우 나중에 통장으로 부쳐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통상 수십만원을 거는데 수백만원을 거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옆 자리에 있던 서씨 일행은 기자가 휴대전화 카메라를 꺼내 들기만 했는데도 ‘절대 사진 찍지 말라’고 경고했다.

보드게임 카페에서 자주 도박을 한다는 김모(30·외국계 은행 근무)씨는 “포커를 치러 오는 사람들은 다양하지만 특히 금융업 종사자들이 많다”며 “주식 거래는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도박은 건 만큼 딸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말했다.

카페 주인 입장에서도 도박이 보드게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수입원이다. 도박은 최소 서너 시간에서 밤새도록 하며 주류와 안주를 곁들이는 반면 보드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머무르는 시간도 짧고 추가 소비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서강대 전상진(사회학) 교수는 “보드게임 유행이 지나자 카페가 도박장으로 변질한 건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며 “규제를 해야겠지만 도박에 대한 욕구는 억제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규제와 욕구 충족 사이에 적정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경찰서 곽정기 형사과장은 “보드게임 카페에서 도박을 한다는 첩보가 들어오면 수사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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