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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000자씩 40년간 ‘셰익스피어’ 번역한 량스치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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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호 33면

1926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량스치우. 오른쪽은 경찰관이었던 부친. 량은 4년간 학비와 생활비가 보장된 국비유학생이었지만 좋아하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까 봐 3년 만에 귀국했다. 김명호 제공

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초·중·고교 교과서에는 루쉰(魯迅)의 문장이 5편씩 실렸다. 5년 전부터 3편으로 줄어들더니 올해부터는 자본가의 부활과 화해 사회의 건설 때문인지 아예 없애버렸다. 대신 ‘반동문인’ 취급을 받던 영문학자 량스치우(梁實秋)의 글이 자리를 차지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6>

신중국 수립 이후 량의 책들은 출판이 불가능했지만 그의 이름을 모르면 중국인이 아니었다. 루쉰과 마오쩌둥 덕분이었다. 량은 젊은 시절 루쉰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문학에는 계급이 없다”며 ‘정치의 도구로 이용될 소지가 있는 문학’을 경계했다. ‘사상의 자유’를 요구했고 ‘사상의 통일’을 반대했다. 좌익 계열의 작가들과도 필전이 그치지 않았다. 루쉰으로부터 “상가집에서 빈둥대는 자산 계급의 주구”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1927년부터 시작된 논쟁은 1936년 루쉰이 세상을 떠나면서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내용은 별게 아니었지만 영향은 만만치 않았다. 항일전쟁 기간에는 전시수도 충칭에 머물며 “문학은 항일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진보적인 작가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혁명 진영과 자칭 진보인사들치고 량에 대한 험담을 안 해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오까지 나서서 ‘자산계급 문학의 대표 인물’로 낙인을 찍어버렸지만 ‘아사소품(雅舍小品)’을 연재해 전쟁으로 상처받기 쉬운 인성(人性)을 달랬다. 그의 글을 읽는 순간만이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전쟁의 불구덩이 속에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량의 산문은 중국 현대 산문 중 최고의 출판 기록을 세웠지만 진면목을 보여준 것은 번역과 연애편지였다. 1930년 말 후스(胡適)가 교육문화기금회 산하의 번역위원회 주임을 맡아 5개년 계획을 세웠다. 『셰익스피어전집』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1856년 선교사들에 의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이래 찔끔찔끔 단행본들이 나온 적은 있었다. 거의가 엉터리였다.

1940년대 중엽 상하이 최고의 여가수였던 한칭칭.

후스는 원이둬(聞一多)·쉬즈뭐(徐志摩)·천위안(陳原)·예궁차오(葉公超)·량스치우(梁實秋) 등 5명을 역자로 선정했다. 량은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시작은 했다. 한참 하다 보니 나머지 네 사람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원은 민주화 운동을 하느라 바빴고, 쉬는 연애에 정신이 없었다. 예는 글 한 번 잘못 썼다가 한밤중에 끌려가 얻어맞고 나오더니 대학에 있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다며 정계로 투신했다. 천은 국제연맹 대표로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후스는 난감했다. ‘차나 한잔 하자’며 량을 불러냈다. 이날 량은 벽돌 반쪽만 한 찐빵 12개와 자장면 세 그릇을 앉은 자리에서 먹어 치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스는 “번역을 너 혼자서 한번 해보라”며 량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는 날 멋진 파티를 열어주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즈음 상하이의 한 상인 집에서 43년 후 량의 부인이 될 한칭칭(韓菁淸)이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량은 하루에 2000자씩 40년간을 셰익스피어와 씨름했다. 1948년 대만으로 나온 후에는 더위와 치질에 시달렸다. 펜을 놓고 일어날 때마다 의자에는 붉은 피가 얼룩져 있었다. 1970년 전집 40권이 완간되는 날 8년 전 세상을 떠난 후스가 그리워 엉엉 울었다고 한다. 자본가의 주구 소리를 들었지만 단 한 푼도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1974년 봄 량은 상처했다. 미국 시애틀에서 부부가 함께 시장에 장보러 갔다가 건물에 매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지는 바람에 부인만 변을 당했다. 조강지처를 그리는 글들을 발표해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잠시였다. 우연한 자리에서 왕년의 상하이 가후(歌后) 한칭칭을 만나자 구애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도 처음에는 답장을 보냈지만 점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루에 1통은 기본이고 2통, 3통씩 보내는 날이 더 많았다. 73세의 량은 부인 사망 10개월 만에 재혼에 성공했다. 량이 한에게 보낸 연애편지는 연령·수량·기간이 모두 범상치 않았다. 오죽했으면 기네스 북에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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