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드레우 총리의 ‘땅귀신’ 비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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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호 35면

금융 투기 세력에 대한 비판이 다시 비등해지고 있다. 지난해 초 이후 2라운드 격이다. 이번엔 그리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앞장서고 있다. 그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월가 금융회사들을 지목하며 “투기 세력을 근절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나서는 “투기 세력이 그리스 관련 자산을 덤핑하는 바람에 위기가 악화됐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와 회담 땐 “땅귀신들을 막아야 (그리스) 사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땅귀신은 정치인들이 국제 투기 세력을 공격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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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를 파판드레우의 정치적 기동전으로 풀이했다. 부채위기와 긴축으로 비등해진 그리스인들의 분노를 투기 세력에게 돌리는 정치적 책략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메르켈과 사르코지,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가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헤지펀드와 투자은행 트레이더들의 투기 행위를 막아야 한다고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조만간 대책이 제시될 듯하다. 올 6월과 11월에 열린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도 투기대책이 핵심 화두로 떠오를 듯하다.

돌이켜 보면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늘 통과의례처럼 투기 세력 때리기가 뒤따랐다. 이른바 ‘포스트 위기 증후군’이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직후엔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맛이 헤지펀드 귀재인 조지 소로스를 거칠게 비난했다. 그는 “소로스가 아시아 통화들을 투기하는 바람에 위기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10년 전인 1987년 블랙먼데이 때는 ‘컴퓨터’가 원흉으로 떠올랐다. 월가 금융회사들이 채택해 쓴 프로그램 매매가 주가 대폭락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1929년 대공황 직후에는 공매도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허버트 후버 당시 미 대통령은 백악관을 찾은 월가 금융인들에게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 순간에 보유하고 있지도 않은 주식을 팔아 막대한 수익을 챙기는 벌레 같은 제도(공매도)를 없애야 한다”고 핏대를 올렸다.

금융계의 반발·비판도 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나 파이낸셜 타임스(FT), 블룸버그통신 등이 글로벌 금융계를 대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비판적인 기사나 칼럼을 내보낸다. 시장 자유와 효율을 생각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울림이 적다. 위기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내세우는 시장 자유나 효율이 힘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럴 때 정치인은 금융계의 반발보다 대중의 분노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금융위기 후 요란한 진상조사가 뒤따른 것도 그래서다. 대공황 직후 연방정부의 대폭락조사위원회와 미 의회의 페코라청문회, 87년 블랙 먼데이 이후엔 브래디위원회, 97년 아시아금융위기 직후엔 국제통화기금(IMF)의 헤지펀드조사위원회 등 이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조사기구가 설치됐다. 결과는 하나 같이 흐지부지였다. 프로그램 매매나 공매도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버블→투기→위기로 이어지는 숙명도 되풀이됐다. 이번 위기도 비슷한 수순을 밟고 있다. 정치인이란 직업 자체가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기 어려워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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