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빈집 … 낮도 불안, 밤엔 아예 발길 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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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납치 살해된 부산시 사상구 덕포1 동 이모(13)양 집 바로 앞에 사는 임성문(51)씨는 11일 오후 기자에게 목청부터 높였다.

임씨의 목소리가 커지자 뒷집의 박명순(54·자영업)씨도 튀어 나왔다. 그는 “3개월 전 새벽에 뒤쫓는 남자를 피해 급히 문을 따고 방에 들어가 한참 불안에 떨었다”며 “밤에 다니기가 너무 무섭다”며 대책을 호소했다. 이양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길태는 물론 우범자들이 범행하기 좋은 장소로 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박씨 집 옥상에서 바라보자 이양의 시신이 들어있었던 물탱크가 놓였던 자리가 10여m 거리다. 왼쪽으론 사상고교, 왼쪽 뒤편엔 이양이 진학하려던 덕포여중, 멀리 앞쪽엔 범인이 잡힌 골드빌라 일대가 보인다. 집 바로 아래와 좌우에는 기와·슬라브 지붕이 다닥다닥 경사지게 붙어 있다. 골목을 돌아보니 담벼락마다 전세 입주자를 구하는 쪽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일부 집 대문에는 폐쇄회로 TV(CCTV)가 설치돼 있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동네 입구에서 이양의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갈수록 좁아져 집 근처는 겨우 어른 한 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다. 이 지역은 밤이 되면 인기척도 없다. 빈집이 워낙 많은 데다 주민들이 외출을 꺼리기 때문이다. 빈집 한 곳에 들어갔더니 마당에는 바람 빠진 축구공·농구공 등이 널려 있다. 담벼락 밑엔 깨진 병과 깡통 등이 수북하다. 앞집도 비슷했다. 한 주민은 “5~6가구가 살던 이양의 집에도 이양 가족만 남아 있어 저녁에는 무섭다”고 전했다. 이 일대 재개발 단지는 7만2000㎡. 2004년 1172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30% 이상이 이사를 갔다.

인천서부경찰서 대원들이 11일 가정동 도시재생사업지구에서 방범순찰을 하고 있다. 부산 여중생 살해사건이 재개발 현장에서 발생함에 따라 경찰은 전국의 재개발지역에 대한 방범활동을 강화했다. [인천=연합뉴스]

현재 부산에는 4000여 채의 폐·공가가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대부분 재개발지역에 있다. 사업 시행인가를 받았으나 착공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시가 중점관리대상으로 선정한 재개발지구만 62곳에 이른다. 이 같은 사정은 부산만의 일이 아니다.

2006년 12월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된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고등동 주변도 슬럼화되고 있다. 사업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3년째 보상을 지연하면서 6000여 가구 중 2000여 가구가 이사를 가 폐가가 늘고 있어서다. 절반 정도는 세입자가 살고 있지만 나머지 1000여 가구는 빈집으로 남아 우범지대로 전락하고 있다. 주민 이형순(38·여)씨는 “최근 빈집이 늘어 우범지대가 되지 않을까 무섭다”고 말했다. 자신은 물론 첫째 딸(15·중2)은 저녁이면 외출을 삼간다는 게 이씨 말이다. 이 밖에 인천에서는 가정 오거리 지구 등 도심 재생사업이 진행 중인 10여 곳에서, 대구시 남구 대명2동의 주택가와 이천동 등에서 재개발사업과 관련, 빈집들이 늘어나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한편 경찰청은 11일 전국의 재개발지역 현장 입구에 초소를 설치하고 경찰관뿐 아니라 전·의경 상설부대, 자율방범대 등과 합동으로 도보 순찰 위주의 방범 활동을 강화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부산=황선윤 기자 [전국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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