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식인 지도] 네트워크 금융자본주의의 제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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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에서 힘이 센 사람은 누구일까. 정치 권력의 자리를 제치고 급부상하는 세력은 아마도 '전자투자가(electronic investor)' 집단일 것이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수많은 단말기를 통해 이 순간에도 외환거래로부터 선물거래에 이르기까지 각종 거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화 시대에 실질적인 파워를 쥔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들은 네트워크로 연결이 가능한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서 유독 우리의 눈길을 끄는 사람들은 전자투자가 그룹의 '큰 손' 들이다. 굴지의 기관투자가들과 전설적인 명성을 지닌 월가의 인물들이라 하겠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우리들은 세계화된 세계에서 월가의 큰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파워엘리트 집단임을 확인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J P 모건, 메릴 린치, 골드먼 삭스, 샐러먼 스미스 바니 등이 기관투자가들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다. 월가의 거물들로는 조지 소로스(71), 존 템플턴(89), 워런 버핏(69), 칼 아이칸(65) 등을 꼽을 수 있다.

***97년 외환위기 통해 '큰손' 확인

국제금융자본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논의와 관계없이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국가경영이건 기업경영이건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굵직한 몇몇 사건들과 기행(奇行)으로 알려진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의 첨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지 펀드의 제왕으로 널리 알려진 소로스는 헤지 펀드의 위력을 만천하에 증거한 인물이다. 헤지 펀드는 뮤추얼 펀드나 연기금과는 달리 국제자본시장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초단기 금융상품으로 이루어진다.

헤지 펀드가 주요 투자대상으로 삼는 파생금융상품의 경우 5~10%의 증거금만으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자본금의 20배에 달하는 자금을 운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력하다.

또한 헤지 펀드는 그 성격상 치고 빠지는 전략을 신속하게 구사하는 등 매우 기민하게 움직여 다른 투자기관들을 리드하는 선행지표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92년 영국의 잉글랜드은행을 초토화했던 파운드화 매도나 97년 태국 바트화 매도로 본격화된 아시아 외환위기는 헤지 펀드의 위력이 메가톤급 무기에 해당할 수 있음을 잘 가르쳐 준 바 있다. 수십년간 제조업을 통해 쌓아올린 한 국가의 부(富)가 한 순간에 없어져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외환위기를 통해서 깨달은 것이다.

97년 초부터 헤지 펀드들은 경상수지 적자와 환율이 상대적으로 고평가된 태국의 바트화를 타깃으로 바트화 투매를 계속했다. 헤지 펀드들은 한쪽으로 몰려다니는 군집성향이 강하다. 타이거 펀드 등 월가의 주요 헤지 펀드들이 함께 바트화의 매각 공세에 가담하면서 태국은 외환 보유고가 바닥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태국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하자마자 바트화는 대폭락을 시작했다.

주변국인 말레이시아의 링기트화, 인도네시아의 루피아화, 필리핀의 페소화도 연쇄 폭락했다. 헤지펀드들은 바트화가 본격적으로 폭락하기 직전, 바트화를 대량 매도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소로스를 비열한 투기꾼으로 몰아 붙였으나 펀드들의 반격은 가혹했다.

***27년간 연평균 35% 고수익

그렇다고 해서 소로스가 늘 이기는 게임을 해 온 것은 아니다. 그가 69년에 세운 퀀텀펀드는 27년간 연평균 35%의 고수익을 올리면서 승승장구해 왔으나 87년 10월 19일 월가의 대폭락에 이어 97년 홍콩과 중남미, 98년 영국 등에서 상당한 손해를 보았으며 98년 8월에는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치명적인 손실을 입은 바 있다.

소로스를 필두로 하는 국제금융자본가들의 약진은 결국 정보기술혁명이 가져온 세계화된 세계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자본시장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묶여지는 세계에서 한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정하거나 일국의 경제정책을 왜곡하면 필연적으로 투기자본의 공략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조지 소로스는 자국의 경제 문제를 자기 편한 대로 다루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진 정치가들에게 헤지 펀드라는 메가톤급 금융무기로 강력히 제어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결과는 선의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무자비할 만큼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이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소로스의 기행은 부를 쌓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유식함과 고상함을 향해서 나가고 있다. 그가 존경하는 인물인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의 저서(『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름을 빌려서 '열린 사회 재단' 을 세우고, 동유럽국가들이 미국과 같은 열린 사회를 향해 나가도록 교육과 자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가 98년에 펴낸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책에서는 시장근본주의에 대한 경고를 서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현실 경제에서 탁월한 기업가라고 생각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 그다지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는 피할 수 없는 대세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헤지 펀드를 만들어 국가간의 교묘한 간격을 이용해서 부를 축적한 소로스는 기회의 선점이라는 기업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앞으로 소로스를 비롯한 일군의 전자투자가 그룹들이 미치는 영향은 휠씬 증대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의 활동을 보면서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조지 소로스는 누구인가>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

▶47년 가족과 함께 영국 런던으로 이주, 명문인 런던경제학교(LSE)에서 칼 포퍼의 제자로 철학을 공부

▶56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 주식 투자에 본격 나섬

▶69년 1만달러로 사설 투자신탁회사인 퀀텀펀드 설립

▶79년 자선단체인 '열린 사회 재단(Open Society Fund)' 설립

▶92년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투기로 10억달러 수입 챙김

▶97년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로부터 동남아 통화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받음

▶현재 퀀텀펀드 회장

<번역서>

▶금융의 연금술(국일증권연구소, 95년)

▶소로스가 말하는 소로스(국일증권연구소, 96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김영사, 98년)

<관련서>

▶조지 소로스의 핫머니 전쟁(동녘, 95년)

▶소로스의 모의는 끝났는가(지원미디어, 2000년)

<용어해설>

▶헤지펀드(hedge fund)〓개인모집 투자신탁.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파트너십' 을 결성한 뒤 카리브해의 버뮤다와 같은 조세 회피지역에 위장 거점을 설치해 자금을 운영한다. 도박성이 강한 파생금융상품을 개발해 투자하는 게 특징이다. 소로스의 퀀텀펀드가 대표적이다.

▶뮤추얼펀드(mutual fund)〓투자자가 일정한 펀드에 투자해 주주로서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법률상 독립된 회사다. 투신사가 발매하면 투자자가 가입하는 방식의 수익증권과 달리 주주의 운영 참여가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언제나 돈을 넣고 찾을 수 있는 '개방형' 과 환불이 불가능한 '폐쇄형' 두 종류가 있다. 국내에는 1999년에 도입됐다.

▶연기금(pension fund)〓연금제도에 의해 모여진 자금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원천이 되는 기금을 말한다. 국내의 국민연금기금.사학연금기금.공무원연금기금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파생금융상품(derivatives)〓채권.금리.외환.주식 등의 금융자산을 기초로 파행된 상품. 전통적인 금융상품 자체를 대상으로 한 상품이 아니라 금융상품의 장래 가격변동을 예상해 만든 '금융상품의 가격 움직임' 을 상품화한 것이다. 선물.선물환.옵션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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