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모반과 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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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경칩(驚蟄) 지나 꽃소식 줄줄이 올라오는, 절기상으로는 완연한 봄이다. 그러나 휘몰아치는 눈보라로 겨울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눈이 먹먹하도록 노랗게 꽃바람 부는가 했더니 황사(黃砂)다.

겨울잠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고 나무들도 부옇게 물을 뿜어올리며 만물이 다시 살아나는 절기가 경칩이다. 이때쯤이면 반드시 꽃샘추위가 찾아와 다 지난 줄 알았던 겨울의 매운 맛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 계절의 순리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 이렇게 남의 땅에 쫓겨와 겨울의 '절정' , 그 죽음에 설 수 있었기에 이육사(李陸史) 시인은 '청포도' 익어가는 7월의 고향을 기약할 수 있었다. 죽어 다시 살아나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추위도 없이 꽃들은 만만세세 피고 지는가.

봄이 오니 봄을 노래한 시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 중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이.저승 먼 세상 돌고돌며 발표한 시들이 꽃샘바람 같다. 모반과 순리 사이, 그 어느 한쪽에서 이제 편안하려는 정신을 바짝 일깨운다.

"도망쳐 왔구나/알겠구나//슬픈 사랑 때문에/멀리멀리 도망쳐 왔구나//대웅전 너머 언덕 또 언덕//저 쓸쓸한 독수리 두 발톱 아래 깊이// 숨어 있구나(중략)내/이제야/문득 알겠구나//어찌해/당신이/서자인지를. "

최근 나온 한 박사학위 논문은 통계에 기초해 사회변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으로 金시인을 꼽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를 비롯, 독재정권 아래서 사회민주화를 위한 시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그가 지핀 민주화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생명의 귀중함을 일깨우다 또 다른 감옥에 갇혔다. 이쪽저쪽 그 어느 곳에도 머물려 하지 않은, 영원한 변혁주의자 金씨가 6년여 만에 발표한 시가 환절기, 그 양날을 짊어진 우주적 변혁의 대서사를 일깨운다.

"문득/일어서리라//겨울 산다화 뚝뚝 지는 날//삼소굴(三笑窟)스님들/경허(鏡虛)경봉(鏡峰)명정(明正)스님/무릎 밑 들고나는//잔 바람결에도 드디어는 일어서리라//아아/극락암에서 서리라/남조선에서 서리라. " 설혹 극락, 스승을 찾더라도 섬기며, 문득 일어서 반역하며 떠도는 것이 우주적 자재로움이요, 자유다. 올 봄도 그렇게 반란하며 섬기며 오고 있지 않는가.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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