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포커스] 이라크 총선, 테러 그늘에도 민주주의 새싹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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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이라크의 한 여성이 3일(현지시간) 바그다드 남동쪽 바스라 지역의 총선 투표소에서 입후보자 명단을 살펴보고 있다. 이번 총선에는 325석을 놓고 6172명이 나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바스라 로이터=연합뉴스]

민주주의가 몇 걸음 다가오기는 한 것일까. 7일 이라크전 이후 두 번째로 치러지는 총선에 그 답이 있다. 2005년 전후 첫 총선은 축출된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의 지지세력인 수니파가 불참하면서 반쪽 선거가 됐다. 이번엔 대부분의 정치 세력이 참여한 온전한 선거다. 큰 혼란 없이 새 의회가 구성돼 석 달 뒤 총리를 선출하면 국가 재건사업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미국도 지난해 발표한 계획에 따라 올 8월까지 모든 전투병을 철수시킬 수 있다. 반면 대규모 테러나 정치 세력의 물리적 충돌이 빚어질 경우 부시 전 대통령의 예언이 실현될 날은 더욱 멀어진다.

325석을 놓고 6172명이 입후보한 이번 선거는 크게 4개 정파의 싸움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라크 국립미디어센터가 이달 초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누리 알말리키 현 총리가 이끄는 ‘법치국가연합’이 29.9%의 지지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시아파 핵심인사인 이야드 알라위 전 총리가 중심인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 세력 ‘이라키야’가 21.8%로 바짝 뒤쫓고 있다. 반미·친이란 성향의 ‘이라크국민연맹’은 17.2%, 쿠르드족 연합 정치 세력인 ‘쿠르드동맹’은 10%의 지지율을 보였다. AFP통신 등 외신들은 어떤 세력도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정파 간 연합을 통한 총리 선출이 이뤄질 것으로 예견했다. 소수민족 세력인 쿠르드동맹이 ‘킹 메이커’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과 이라크 주변국들도 이번 총선을 주목하고 있다. 미국은 공식적으론 중립 입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내심 친미 성향의 알말리키 현 총리의 승리를 바란다. 그것이 친미 정권 수립과 예정된 미군 철수를 가능케 하는 길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 이란과 시리아 등 반미 국가들은 알말리키의 집권을 꺼리고 있다. 그래서 이라크국민연맹을 지원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외신들은 선거판이 테러로 얼룩졌고, 부정선거 조짐도 보인다고 보도했다. 가장 어두운 면은 테러다. 특히 4일 테러는 명백히 총선을 겨냥한 공격이었다. 테러범들은 바그다드의 부재자 투표소 두 곳에서 자살폭탄을 터뜨렸다. 또 바그다드 북부 후리야에선 투표소에서 불과 500m 떨어진 도로에서 폭탄이 터졌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7일 선거 경비를 맡은 군인들이었다. 시아파의 재집권을 막기 위한 수니파 무장세력 혹은 국제테러 조직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금권선거도 선거판을 어지럽히고 있다. 닭고기·운동화·담요 등의 생필품 및 현금 살포가 곳곳에서 포착됐다. 이라크 선거법에는 향응·금품 제공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

이슬람 종파(시아파·수니파)와 민족(아랍족·쿠르드족), 종교(이슬람·기독교)가 유권자의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민주화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처럼 분파의 경계를 허물어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인물이 이라크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반면 이번 선거에서 민주주의의 싹이 트고 있다고 보는 쪽도 있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반정부 수니파의 선거 참여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경쟁이 펼쳐졌다고 보도했다. 후세인 시절 집권 세력이었던 수니파는 2005년 총선을 보이콧했다. 이번에도 불참을 선언했다가 최근 입장을 바꿨다. 의회에 진출하지 않으면 정치적 입지가 더욱 약해진다는 판단 때문으로 해석된다.

TV 토론이나 여성 정치 세력의 출현 등 새로운 선거문화도 등장했다. 아랍에미리트(UAE)에 본부를 두고 있는 알아라비아 방송은 지난달 28일부터 이라크에서 후보자들의 설전을 방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상당수 후보가 출연을 거부했지만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참여 폭이 커가고 있다. 여성 12명이 지난달 여성의 권리 신장과 일자리 확대 등을 정강으로 내세운 정당을 만든 것도 화제다. 

파리=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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