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2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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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7. 故 김재익 경제수석

고(故) 김재익(金在益) 경제수석이 주도한 이른바 재무부 점령 사건으로 나는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무차관으로는 김수석이 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일 때 상사였던 강경식(姜慶植) 기획원 차관보(현 동부그룹 금융보험부문 회장)가 승진해 왔다.

이진설(李鎭卨) 공정거래실장이 재무부 제2 차관보로, 이형구(李炯九) 기획국장이 '재무부의 꽃' 으로 통하는 이재국장으로 함께 왔다. 재무부에서는 나 말고도 하동선(河東善) 차관보와 정영의(鄭永儀) 기획관리실장(현 LG투자증권 회장)이 각각 기획원 차관보와 한직인 공정거래실 상임위원으로 이동했다.

학자 출신인 김수석은 이상론에 기운 정책을 많이 내놓았다. 금융실명제 추진도 그 중 하나였다. 실명제가 좌절되고 금융사고가 줄을 잇자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그와는 성향이 판이하게 다른 서석준(徐錫俊) 전 상공부 장관을 부총리에 기용했다.

김수석은 생전에 남덕우(南悳祐) 전 총리에게 "나는 실명제를 주동하지 않았으며 나를 주동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억울하다" 고 말했었다.

나를 기획원으로 보내기 전 김수석은 내게 입버릇처럼 '존경하는 선배' 라고 했었다. 1970년대 후반 기획원 기획국장 시절 그는 수시로 내 방에 들러 국제금융 분야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묻곤 했다. 80년 국보위 시절 전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를 할 때도 가끔씩 내게 들러 자료를 얻어갔다.

그런 인연으로 내가 재무차관이 될 때 그가 도운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당초 5공의 탄생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강력한 군부정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5공 경제비사를 다룬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이장규 저)에 따르면 이 무렵 그는 상당한 좌절 끝에 경제관료 생활을 청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부족을 느끼고 있던 터에 자기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줄 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 사람이 全대통령이었다.

그의 가장 큰 공은 가정교사를 하는 동안 全대통령에게 물가 안정을 우선시하고 개방으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김수석에 대해서는 그러나 그의 공적만 강조돼 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의 이상론이 끼친 부작용에 대해서도 나는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아웅산에서 비명에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그 나름의 개혁이 중단됐다고도 볼 수 있다. 차분히 하나 하나 실행에 옮겼더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혹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88년 1월 6공 정권이 들어서며 정부는 부실기업 정리 내용을 공개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그 해 7월 국회 재무위에 백서(白書)를 제출했다. 백서엔 부실기업 정리 당시 나와 함께 일한 재무부 실무자들이 작성해 놓았던 게 그대로 수록됐다.

그 해 10월 국정감사에서는 부실기업을 인수한 회사들에 자금을 지원한 것을 둘러싸고 야당 의원들의 추궁이 빗발쳤다.

10월 13일자 중앙경제신문은 이 과정에서 한 은행장이 부실기업 정리 참여에 보람을 느낀다고 답했다가 곤욕을 치렀다고 전하고 있다.

야당의 김모 의원이 김영석(金英錫) 조흥은행장에게 "삼호를 인수한 대림에 구제금융을 지원한 것은 특혜가 아니냐" 고 따졌다. 그러자 김행장이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자신만만하게 부실기업 정리 참여는 잘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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