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취임 3년] 경제살리기 국력 풀가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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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은 "중국의 진시황과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가장 존경한다" (1999년 12월, 일본 小學館출판사 인터뷰)고 밝힌 적이 있다.

"진시황의 개혁정책이 기득권 세력 반발로 몰락했지만 군현제 실시, 언어통일 등 업적은 사후 중국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는 평가였다.

그러면서 金대통령은 지도자의 두가지 덕목으로 '국정방향에 대한 확고한 비전' 과 '현직을 떠난 뒤의 평가' 를 꼽았다. 金대통령은 최근 들어 "일시적 인기에 연연치 않겠다" 는 원칙을 표명하는 일이 잦아졌다.

◇ 국민역량 총결집=취임 초 金대통령은 'IMF환란' 극복에 전념했다. 이때의 리더십은 국민역량 총결집을 통한 위기극복이었다. 효과를 봤고 국민들도 경제회복에 동참했다.

역설적이지만 金대통령의 리더십은 외환위기의 끝이 보이던 99년 5월 말의 '옷로비 사건' 으로 위기를 맞았다. 金대통령은 "마녀사냥식 여론재판" 이라고 넘어가려 했지만 민심 이반(離反)의 씁쓸함을 맛봤다. 집권 초반의 '허니문(민심.언론과의 밀월관계)' 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金대통령은 "국민은 하늘" (99년 11월, 신당창당준비위 결성대회)이라며 '민심 최우선' 을 선언한다.

◇ 시민단체 원군론=金대통령은 99년 후반부터 개혁 추진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외부 원군을 끌어들이려 했다. 바로 시민단체였다. 지난해 4.13총선 때 시민단체의 낙천.낙선 운동을 통해 정치개혁을 밀어붙였으나 반발은 공동정권 내부에서 터졌다.

자민련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는 '조반유리(造反有理.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로 중국 문화혁명 때 마오쩌둥이 내세운 구호)의 한국식 음모' 라고 반발, DJ의 새 리더십 자체를 격하시켰다. DJP 공동정권은 그 후 10개월간 비틀거렸다.

◇ 상생(相生)의 정치=4.13 총선 직후 金대통령은 이회창(李會昌)총재를 직접 상대해 정치를 하려 했다. DJ.李총재의 지난해 4월 24일 영수회담은 '건설적 협력' 을, 6월 회담은 의료대란 해결, 10월에는 '상생 정치' 를 다짐했다. 그러나 8월 말 터진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은 정권의 도덕성 논란을 촉발했다. 박지원(朴智元)문광부장관의 퇴진은 DJ 권력 주변의 변화로 이어졌다. 정현준.진승현 게이트로 국정혼선은 확산했다.

金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은 그의 정치역정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지만 정국안정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거꾸로 북한 퍼주기 논란과 "내치를 외면한다" 는 불만이 커졌다.

야당은 검찰총장 탄핵안으로 압박했고, 여권에선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다" 는 자조(自嘲)와 함께 '이회창대세론' , '7년 대통령론' (사실상 야당이 집권하기 시작했다는 논리)이 퍼졌다.

◇ 강력한 정부론=그런 속에서 '강력한 정부론' 이 등장했다. 金대통령은 "정치안정.경제회생을 위해 대통령이 확고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올 신년사)고 했다.

여권에선 "권노갑 고문 2선퇴진에서 보듯 권력내부의 갈등 차단과 장악을 위해서도 강한 정부론은 필요하다" 고 생각했다. 곧 DJP공조 복원, 의원 당적이동이 이어졌다.

'야당압박' '언론사 세무조사' 가 강한 정부론의 일환이 아니냐는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여권은 "강력한 정부론으로 경제를 살리면 야당의 비판은 설득력을 잃을 것" 이라며 프로그램을 다듬고 있다. 金대통령은 자신의 목표인 '역사가 평가하는 대통령' 의 실험무대가 될 집권 4년차를 이렇게 맞고 있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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