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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올림픽서 확인된 ‘20대 신 한국인’그들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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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역대 최대 성과를 올린 ‘쾌속세대’ 전사들이 2일 귀국했다. 이들이 일궈낸 쾌거와 발랄한 모습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저력을 확인했다. 쾌속세대의 경이로운 성과는 스포츠 분야에 국한된 게 아니다. ‘들러리 악기’로 치부되던 더블베이스로 세계를 제패한 성민제(20)씨, 사교육 없이 강화도 섬마을에서 하버드대에 진학한 김은지(21)씨, ‘사회적 기업’을 토대로 한 신개념 의료봉사에 나선 송호원(24)씨, 인터넷 배추장사로 ‘농촌 블루오션’을 개척한 정문수(19)군은 다양한 정보로 무장하고 능력으로 승부한 ‘신(新)도전자’들이다. 이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바로 자신들이다.

봉사·공부·음악·창업 … 분야 안 가리고 도전을 즐긴다

박성우·김효은 기자


‘기업형 의료봉사’ 개척한 의대생

송호원“의대 다닌다고 모두 의사가 꿈은 아니죠. 의사 출신 대통령은 어떨까요?”

서울 신촌에서 만난 의료봉사단체 ‘프리메드(FREEMED)’ 대표 송호원(24·연세대 의대 본과 4학년·사진)씨의 꿈은 엄청났다. 송씨는 “대통령이란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풀어 나갈 위치에 있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두가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지향하는 프리메드도 이런 고민 끝에 나왔다.

프리메드는 단순한 의료봉사 모임이 아니다. 사회적 기업에 가깝다. 의약품 조달을 후원금에만 의존하지 않고 수익사업과 연계시켰다.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위해서다. 뜻을 같이하는 50여 명의 대학생이 모여 여러 수익모델을 연구했다. 가방·티셔츠 등을 직접 만들어 팔기도 하고, 1000원씩 기부금을 받아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를 후원하는 ‘1000원 수술’ 활동도 한다. 지난해 2월 시작한 ‘프리메드 버스’는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다. 의약품과 봉사단원의 발이 될 중고 버스를 사서 차 창가에 기업 광고를 실었다. 이 버스를 타고 이동해 매주 토요일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노숙인 무료 진료를 벌인다. 신종 플루로 두 달간 중단된 것을 제외하면 송씨는 매주 빠지지 않고 나와 봉사활동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판자촌을 찾아다니며 구급상자를 나눠주는 ‘홈 비지팅’ 봉사도 한다. 올해부턴 지난해 12월에 뽑은 프리메드 2기들이 새 사업을 시작한다. 송씨는 “사업 초창기엔 제가 직접 기업과 학교를 뛰어다니며 광고주를 찾고, 잠을 줄여 가며 사업아이템을 구상했다”며 “이제는 지속적으로 프로젝트들이 굴러갈 수 있도록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씨는 프리메드 이전에도 정당의 대학생정책자문위원회, 컨설팅 회사 인턴, 자연과학실험실 연구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심장내과의인 아버지가 “한 우물만 파라”고 말하지만 송씨는 관심이 가는 일이라면 일단 저지르고 본다. “저는 저희 세대가 아버지 세대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봐요. 기성세대가 민주화운동을 통해 사회에 관심을 표출했다면, 저희는 프리메드 같은 활동들로 사회에 공헌을 하고자 하죠. 방법이 다를 뿐이에요.”


하버드 전액장학생 ‘강화 섬 소녀’

김은지 하버드대 3학년 김은지(21·사진)씨는 강화도 초지리에서 자란 ‘섬 소녀’다. 과자 하나 사려고 해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곳에서 16년을 살았다. 그가 대원외고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선생님도 가족도 말렸다. 모두들 “내신성적 잘 받아 ‘농어촌 특별전형’으로 서울대에 가라”고 했다.

김씨는 “고향은 아름답고 그리운 곳이지만 너무 답답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바깥세상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꿈꾼다면 이룰 수 있다’는 말을 가슴에 품고 무작정 공부했다. 학원도 과외도 없었지만 대원외고에 합격했다. 유학반에도 붙었다. 그러나 해외에서 몇 년씩 살다 온 친구들과, 부모님이 학원 스케줄을 짜주고 인턴십까지 마련해 주는 동료들과의 경쟁은 만만치 않았다. 김씨의 집안 형편은 수업료도 장학금으로 해결해야 할 만큼 빠듯했다. 학원 대신 독서실로 향했다. 친구들의 학원 교재를 복사해 공부하고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고3이 됐다. 장학금을 받지 않고선 대학 진학이 어려웠다.

호텔리어를 꿈꿨던 김씨는 서울 시내 특급호텔 CEO들에게 유학 비용을 지원해 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CEO들이 만나자고 했을 땐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다들 국내 대학 진학을 권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지원 대학에 모두 장학금 신청을 했다. 결국 2007년 4월 하버드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브라운대·카네기멜런대 등 모두 9개 대학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이 중 5군데가 장학금을 제시했다. 김씨는 “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장학금 지원 자격이 안 된다고 할 때 내 상황을 적은 장문의 편지를 보냈더니 ‘너 같은 학생은 처음’이라며 승낙한 곳도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하버드 입학 초기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친구들을 보며 좌절하기도 했지만 대원외고 시절 그랬듯 금세 극복했다. 그는 “공부에 대한 간절함·절박함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외교학 전공으로 하버드 아시아국제학생회의(HPAIR)에서 활동 중이다. “제가 수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제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호텔리어를 동경하던 김씨의 새로운 꿈이다.


연매출 1억 ‘인터넷 배추장사’

정문수 전남 해남군 황산면에 사는 정문수(19)씨는 연매출 1억원을 올리는 기업가다. 고교 2학년 때인 2008년부터 농산품 판매사이트에서 해남산 배추·고구마·감자·마늘 등을 팔고 있다.

아버지에게 400만원을 빌려 시작한 사업이 2년 만에 경리 2명을 둘 만큼 커졌다. 신선도가 중요한 절임 배추를 주문 다음 날 바로 배송한다는 원칙으로 판 것이 김장철에 히트를 쳤다. “회원이 1만 명인데 VIP 고객, VVIP 고객으로 나눠 특별 관리를 해요. 휴대전화로 안부 문자도 보내고, 신상품이 나오면 맛보라고 공짜로 보내드려요.”

정씨는 중학생 때 온라인에서 중고제품을 팔아 돈을 조금 벌었다. 인문계고에 진학했지만 1학년 2학기 때 전문계고로 전학했다. 정씨는 “남들처럼 대학 나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비전이 안 보였다”며 “당장이라도 원하면 창업도 할 수 있는 실업고를 택했다”고 말했다. 온라인 쇼핑몰 창업을 준비하다가 ‘농산물’에 주목했다.

“대부분의 농부가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아 산지에서 직접 판매하는 사이트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이디어를 냈죠.” 곧장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거래처를 발굴했다. 직영이라 가격이 저렴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라고 광고도 냈다. 절임 배추는 다음 날 오후 3시까지 무조건 배송되도록 택배 회사와 계약도 했다. ‘값싸고 신선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주문이 몰렸다.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일과 공부를 함께했다. 쉬는 시간, 점심 시간에 컴퓨터 앞에서 주문을 체크하고 고객 질문에 답변을 달았다. 학교가 끝나면 직접 배송물품을 포장했다. 현장에서 작업해야 같이 일하는 어른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생 농부로 사셨던 아버지는 처음엔 정씨의 선택에 반대했다. “좋은 대학에 가길 바라셨는데 갑자기 인터넷으로 사업을 한다니 놀라셨겠죠. 아버지 세대는 새로운 것에 거부감이 있으니까요.” 지금은 아버지가 제일 큰 거래처이자 사업파트너다. 정씨는 올해 전남대 농업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농산물 판매를 더 잘하기 위해서다. “농작물을 자식처럼 키우는 농부의 마음을 소비자들에게 잘 전하려면 공부는 필수라는 걸 깨달았다”며 "우리의 농촌을 더 잘 알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더블베이스 연주로 세계에 우뚝

성민제 더블베이스는 오케스트라의 조연이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주선율을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더블베이스 독주회도 드물다. 더블베이스 연주자 성민제(20·사진)씨는 이런 고정관념을 깼다. 그는 지난해 연주자 선정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음반사 ‘도이체 그라모폰(DG)’에서 앨범을 냈다. 한국인으로선 김영욱·정경화(이상 바이올린), 정명훈(지휘), 조수미(성악)에 이어 다섯 번째다. 갓 스무 살의 나이에 최고의 음악가 반열에 든 것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최근 뮌헨음대 최고연주자 과정 첫 학기를 마쳤다. 무명의 신인이 DG 앨범을 낸 것도 화제였지만 ‘조연 악기’인 더블베이스로 솔로 앨범을 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씨가 더블베이스를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일단 말도 안 되게 크잖아요.” ‘모태범·이상화식’ 답변이 돌아왔다.

도전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됐다. 190㎝나 되는 더블베이스를 백과사전과 방석 더미를 딛고 올라가 잡았다. 선화예중에 들어갔을 때 더블베이스 전공자는 성씨 혼자였다. “솔직히 좀 외로웠다”고 털어놓는다. "하루에 4시간 정도 연습했고 연습 안 할 때도 연습실에서 살았어요. 그리고 연습할 때만큼은 누가 얘기해도 안 들릴 정도로 집중해서 했어요. 내 음악을 하는 거니까.” 성씨는 세계 3대 더블베이스 콩쿠르 중 ‘슈페르거’ ‘쿠세비츠키’에서 각각 16세, 17세 때 우승하고 ‘뮌헨ARD’만 남겨놓고 있다. 두 차례나 우승했지만 ‘1등’을 위해 나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저는 아직 배우는 입장이에요. 콩쿠르는 작심하고 계획을 세워서 나간 게 아니라 기회가 돼서 그냥 나간 거예요. 다른 참가자들도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음악 하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언제부턴지 더블베이스를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메인 악기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더블베이스는 솔로 연주곡이 많지 않다. 그래서 성씨는 아예 자신이 더블베이스 연주곡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한 3년 뒤부터 작곡을 해볼까 해요.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이 음악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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