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주민증·인감 '범죄증서' 로 팔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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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노숙자 C(47)씨는 최근 홀어머니(70)가 사는 서울 왕십리 집에 1년만에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세무서와 신용정보회사 등에서 날아온 세금고지서와 각종 독촉장들이 두툼하게 쌓여 있었던 것.

세무서를 찾아간 C씨는 자신이 1998년 이후 여러 개의 핸드폰에 가입하고 신용카드를 쓴뒤 4백60여만원을 내지않아 신용불량자가 된 사실을 알게됐다. 97년 외환위기 탓에 기계부품 공장을 정리하고 노숙자 생활을 시작한 그다.

그제서야 C씨는 98년 여름 노숙생활을 통해 알게된 K(39)씨에게 인감도장과 주민등록증·증명사진 ·주민등록등본 ·인감증명 등을 10통씩 30만원에 넘겼던 기억이 났다.

C씨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세무서 직원은 “모든 게 당신 잘못”이란 말 뿐이었다.

푼돈이 궁한 노숙자들로부터 헐값에 넘겨받은 신원(身元)관련 서류로 각종 불법행위를 일삼는 조직적 범죄가 극성이다.

신용카드를 만들어 멋대로 쓰거나 각종 제품을 할부구입한 뒤 되파는 일,불법 유흥업소의 소위 ‘바지사장’으로 등록시키고 탈세를 하는 사례도 있다.

당사자인 노숙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신용불량자로 전락, 이후부터 금융기관 예금 등 모든 신용거래가 중지되고 민사소송의 대상까지 되는 것이다.

경찰은 특히 이들의 명의가 최근 늘고 있는 위조여권을 만드는데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명의 암거래=서울 북창동 일대에서 '털보' 라 불리는 사기단원에게 노숙자 명의를 구해주는 브로커 일을 했던 K(37)씨.

그는 12일 기자에게 “98년부터 작년말까지 노숙자 한명당 50만∼1백만원씩 1백명이상의 명의를 팔아넘겼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사기단은 소재불명인 노숙자 이름을 이용해 돈을 만들 수 있는 모든 일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본사 확인 결과 노숙 생활 6년째인 B(37)씨는 서류상으로는 98년부터 영등포 H·N주점 등 유흥업소 두곳을 소유한 업주로 등록돼 있었다.

이 업소의 소유주는 B씨 이전엔 또다른 노숙자로 돼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실제 소유주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노숙자 J(33)씨는 본사 추적 결과 본인도 모르게 지난 한해동안 8차례나 신용카드 대출을 받아 2천여만원을 갚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었다.B씨는 50만원,J씨는 30만원을 받고 브로커에게 ‘명의’를 판 사람들.

◇네명중 한명 신용불량자 전락=기자가 지난 3일부터 열흘동안 명의를 팔아넘겼다고 밝힌 노숙자 1백명의 신용상태를 직접 추적해본 결과 25명이 신용불량 상태가 된 것으로 확인됐다.

노숙인 다시 서기 지원센터 황운성(黃雲聖 ·42)소장은 “서울시내 노숙자 3천8백90여명중 서울역 등에서 생활하는 3백여명의 노숙자 대부분과 수용시설 이용자중 10% 수준인 6백여명이 주민 기록을 팔아넘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 영등포 노숙자 쉼터인 ‘자유의 집’을 맡고 있는 영등포경찰서 최영근(崔英根)경사는 “매일 자유의 집에 배달되는 최고장 ·세금고지서 50여통중 절반이상이 노숙자 본인이 모르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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