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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3000년 뒤 런던…영국판 ‘웰컴 투 동막골’…색깔 있는 이야기 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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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일러스트레이터 출신 작가가 그린 도시문명의 암담한 미래

모털 엔진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436쪽, 1만2000원

스릴러물, 성장소설 그리고 사회소설로도 읽히는, 다양한 얼굴의 SF다.

배경은 약 3000년 후의 지구. 당연히 오늘날과 같은 지정학적 구도는 사라졌다. 국가 대신 거대한 캐터필러 위에 실린 견인도시(Traction City)들이 먹고 먹히는 투쟁을 벌이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주인공 톰 내츠워디가 사는 런던 시가 바닷물이 말라버린 옛 북해에서 광산타운을 추적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막이 오른다.

미래의 런던은 철저한 계급사회로 톰은 역사학자 길드의 3등 견습생이다. 역사학자 길드는 엔지니어· 상인· 내비게이터 길드와 나란히 도시의 주요 조직이긴 하지만 올드-테크(디지털로 상징되는 뉴테크가 아님을 주목하자)를 발굴하는 일이 주업무다. 궤도발사 원자탄과 ‘60분 전쟁’이라 불리는 맞춤형 바이러스폭탄으로 지구가 초토화된 뒤여서 컴퓨터조차 만들지 못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말썽을 일으킨 벌로 내장갑판으로 내려가 작업을 하던 톰은 역사학자 길드 회장인 밸런타인을 만난다. 여기서 밸런타인을 암살하려던 헤스텨 쇼를 막다가 결국은 도시 밖 아웃컨추리로 떨어지고 만다. 톰은 런던으로 돌아가려고 황무지를 헤매지만 독재적인 런던시장 매그너스 크롬은 오히려 비장의 무기 ‘메두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반기계인간을 보내 톰과 헤스터를 살해하려 한다. 두 사람은 해적타운에 잡혀 노예로 팔릴 뻔하는가 하면, 자연친화적인 정착촌을 주장하는 반 견인도시주의자들을 만나는 등 모험을 거듭하며 런던 시와 반 견인도시 연맹간의 결전에 끼어들게 되는데….

SF 『모털엔진』은 각 도시들이 ‘언젠가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엔진(Mortal Engines)’에 얹혀 약육강식의 투쟁을 벌이는 3000년 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모험소설이자 성장소설, 환경소설이다. 사진은 이들 ‘견인도시’와, 황폐한 지구를 오가는 비행선을 상상해 그린 데이비드 와이어트의 일러스트. [부키 제공]

소설은, 흡인력이 뛰어나다. 시간 순으로 전개되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이지만 ‘메두사’의 정체, 헤스터의 아픔, 헤스터에 대한 반기계인간 슈라이크의 집착이 복선으로 깔려 책을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떼기 힘들다. 주인공들이 한 자리에 어우러져 결말을 짓는 세인트 폴 성당의 장면이나, 지금의 히말라야 산맥 어림에 있는 반 견인도시연맹의 본거지 바트뭉크 곰파(영원한 힘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대결은 블록버스터 영화 못지 않은 긴박감을 자아낸다.

섬세하기도 하다. 특히 헤스터의 심리묘사가 눈길을 끈다. 그는 여느 소설의 아름답고 착한 여주인공들과는 달리 흉칙한 얼굴에 걸핏하면 화를 잘 내고 무모하기도 하다. 그런 헤스터가 톰과 지내면서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나 톰이 견인도시란 환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 책은 가볍지 않은 문명비판적 시각을 담아 단순한 재미의 SF와 구분된다. 니콜라스 퀘이크가 창안했다는 ‘도시진화론’ 에 따라 적자생존의 경쟁에 뛰어든 대도시들과 이를 따르다가는 심각한 자원고갈과 자연파괴로 지구라는 행성이 존속할 수 없다는 반 견인도시주의연맹은 자동차문명과 생태주의자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죽은 인간을 기계로 되살린 스토커와 비행선이 함께 등장하는 미래세계는 문명의 퇴행 가능성을 암시한다. 다른 도시를 먹어치우고, 끊임없이 달리는 엔진을 가동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견인도시는 현대 자본주의의 미래상과도 겹쳐진다. 또한 런던 시 하층민과 죄수의 처참한 삶, 잡은 도시를 해체하는 장면 등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이 소설은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인 필립 리브의 데뷔작으로 ‘견인도시 연대기’ 4부작 첫 권이다. 원래 청소년 용으로 쓰였다지만 아는 만큼 즐길 수 있어, 굳이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의 추천이 아니더라도 후속작 출간이 기다려지는 작품이다.

김성희 기자


섬세한 유머로 버무린 시골 섬의 엉뚱한 북클럽 소동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이덴슬리벨
440쪽, 1만3000원

평생을 ‘예비작가’로만 산 여인이 있었다.

도서관·서점에서 일하며 창작을 꿈꿨지만 미완성의 습작일 뿐, 그의 이야기 솜씨는 가족이나 글쓰기 모임 회원들과 함께 한 식탁에서나 빛났다.

그의 얘기에 울고 웃던 이들의 재촉에 예순이 넘어 도전해 생애 처음으로 마무리한 소설 한 권. 하지만 그는 책을 손에 쥐어보기도 전에 2008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쓴 매리 앤 셰퍼 얘기다.

다행이다. 작가는 떠났지만,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의 솜씨는 활자에 속속들이 녹아 들어 잔잔하면서도 생기발랄한 작품으로 살아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시점을 배경으로 한 그의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다. 총 168통. 소설 속 주인공인 서른 세 살의 인기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줄리엣이 출판사 발행인과 친구, 영국해협의 ‘건지(Guernsey)’섬 사람들 10여 명과 주고받았다.

런던에 사는 줄리엣은 우연히 건지 섬에 사는 도시 애덤스라는 이름의 남성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고 ‘감자껍질파이’라는 이름의 북클럽(독서모임) 이야기를 듣게 된다.

건지 섬은 1940년부터 45년까지 독일에 점령당했던 영국 영토. 세상물정과 거리가 먼 깡촌인데다 독일 점령 당시 라디오 청취도 금지됐던 시골 섬에서 북클럽은 뜻하지 않게 시작됐다.

당시 고기 구경하기 어려운 주민들이 독일군 몰래 돼지구이 파티를 열었는데, 통금에 걸리자 독일군에게 둘러대기 위해 있지도 않은 모임을 핑계댄 것이다. 생존을 위한 거짓말이었지만, 북클럽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주민들은 모임을 계속 가져야 했다.

때문에 그동안 성경이나 종자 설명서 따위 외에는 책이라곤 건드려보지도 않던 섬사람들이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처음엔 구석에서 조용히 파이만 먹다 돌아오던 철물상 주인이 토마스 칼라일의 『과거와 현재』를 읽고, 술주정뱅이였던 남자는 『세네카 서간집』에 빠지게 된 이유다.

줄리엣과 건지 사람들과의 편지는 나치 점령기 당시 건지섬의 참혹했던 현실을 하나 둘씩 드러낸다. 끔찍한 배고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겪은 고통, 가족들의 죽음…. 줄리엣은 이들을 만나기 위해 건지섬을 찾아가고, 그의 삶은 그곳에서 예기치 못한 변화를 겪는다.

소설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영화 ‘브리짓존스의 일기’처럼 섬세하면서도 재기가 넘친다. 줄리엣과 런던의 매력남 마크가 주고받는 편지는 요즘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처럼 톡톡 튀고, 건지섬 사람들의 사연은 영국판 ‘웰컴 투 동막골’의 영상처럼 풋풋하다.

시골 사람들의 투박한 목소리를 통해 찰스 램·세네카·찰스 디킨스 등 문인들의 작품을 거론하는 대목들은 슬그머니 웃음을 자아낸다. 건지 사람들을 통해 지은이는 전쟁의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삶이 어떻게 지속되는지를 전해준다.

셰퍼는 1980년 우연히 건지섬에 갔다가 그곳 역사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공동저자는 그의 소설을 함께 고쳐 쓴 조카딸이다.

책은 아마존닷컴에서 1200개가 넘는 리뷰가 달렸을 만큼 큰 인기를 모았다. 국내에서는 2008년 말 출간됐었으나 바로 절판됐다가 이번에 재출간됐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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