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뮈르달을 기다리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문자 그대로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전세계 총 생산량의 반을 혼자서 생산하는 엄청난 풍요를 누리면서 밖으로는 유일한 핵 보유국으로서 전세계를 호령하고 있었다.

****정면 돌파한 '美의 딜레마'

이렇게 태평성대 속에 빠져 있던 미국에 일대 충격을 가한 사건이 생겼다. 스웨덴의 저명한 학자인 뮈르달이 『미국의 딜레마(The American Dilemma)』라는 책을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이 겉으로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가장 근본적인 모순과 위선 속에서 썩어가고 있으며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미국은 자체의 모순 때문에 세계 지도국의 위치는커녕 망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그 모순이란 바로 '인간에 대한 존엄과 자유' 를 그 무엇에도 우선하는 가치로 신봉하며 건국된 나라가, 현실에서는 그에 정반대되는 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흑인들은 버스도, 식당도, 학교도 백인과 같이 쓸 수 없으며 모든 면에서 백인들로부터 차별받고 멸시받고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 책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본 수많은 미국의 지식인이 이 미국의 딜레마에 대해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법에 의한 엄청난 강제가 실시됐다. 흑인이라면 짐승쯤으로 생각하던 백인 동네의 순 백인 초.중.고교에 흑인 학생들이 수송돼 수 십명씩 강제로 투입됐다.

자기 자식이 갑자기 짐승같이 보여지던 흑인 학생과 짝을 하고 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안 수많은 학부모가 비명을 질렀다.

순 백인만 다니던 앨라배마 주립대에 흑인 학생 1명을 최초로 등교시키기 위해 미국 해병대 군인 수백명이 그 학생을 호위하고 학교로 진입했고 이 장면이 전 미국에 생방영됐다.

거의 모든 공직과 정부기관에 흑인과 여성을 일정 비율 이상(보통 20%)으로 뽑도록 하는 강제 쿼터제가 실시됐다.

미국의 지식인들은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결코 길게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 국민에게 이렇게 설득했다. "우리가 하나되지 않으면 우리는 망한다. 우선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 유색인종에 대한 특별 대우는 그들이 그동안 받은 그 뼈아픈 차별에 대한 보상이다. 이러한 보상을 통해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그 기회를 통해 우리나라가 하나가 돼야 한다. "

근 30년 동안 이러한 정책을 줄기차게 밀고 나간 덕에 미국은 이제 그 근본적인 모순을 대부분 해결했다.

뮈르달 박사가 만일 지금 한국에 와서 우리를 본다면 그는 아마도 『한국의 딜레마』라는 책을 썼을 것이다.

백의민족.단일민족을 가장 핵심적 가치로 삼고 그것을 중심으로 건국됐고 지속되던 이 나라가 지금은 지역간 상호 불신과 이간, 그리고 분열을 확대 재생산하는 근원적인 모순 속에서 내연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모순은 깊어지고 있다. 모든 징후로 봐서 이 나라는 정서적으로 다시 신라.백제.고구려의 옛 패러다임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국病 치유 늦추면 안돼

우리는 과연 이 코리안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이 딜레마를 해결하고 다시 진정으로 하나된 나라, 하나의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으로 보아 그것은 비관적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이나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엘리트 그룹, 지식인들에게 이 문제를 직시하려는, 해결하려는 열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의 지성인들은 이 문제를 직시하기를 피하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많은 지식인이 이 문제에 대해 냉소적.자조적이며 아니면 아예 체념하고 있다. 어느 지성인도, 어느 시민 운동단체도, 어느 언론인도, 어느 정치인도 이 문제를 제1의 우선 순위로 두고 정면돌파하려고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지성인들,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이 1950~60년대 미국의 분열 문제를 미국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문제로 파악하고 한데 뭉쳐 온갖 고초를 무릅쓰며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시도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우리 지성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제2의 뮈르달 교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全聖哲(세종대 세계경영대학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