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션 와이드] 전남 진도 소포마을 '민요 사랑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산촌의 겨울 밤은 도회지나 들판보다 길다.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어둠은 더 빨리 찾아온다.

겨울 밤 우리 가락과 장단을 즐기는 아낙네들을 찾아간 날 밤에도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마을은 십수년 만의 큰 눈 아래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물레야 돌아라 뱅뱅뱅 돌아라/어리렁 서리렁 잘도 돈다/마포장포 실뽑기는 삼한시대 유업이요/물레야 돌아라 뱅뱅뱅 돌아라/어리렁 서리렁 잘도 돈다/무명실로 베짜기는 문익점 공덕이로다/물레야 돌아라…. "

'소포 어머니 노래방' 이란 간판이 내걸린 마을 복판의 한남례(韓南禮.70)할머니 댁에 들어서자 마당 한켠 별채에서 노랫소리가 구성지게 흘러나온다.

한 사람이 메기고 여럿이 막는 물레타령이다. 여섯평쯤 되는 방 안에 열여섯명의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메주 띄우는 냄새 속에서 우리 가락을 즐기고 있었다.

"둥당에 덩~ 둥당에 덩/덩기 둥당에 둥당에 덩~/솜보선 솜보선 애광목에 솜보선…. "

저마다 무릎 앞에 엎어 놓은 바가지를 숟가락과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때로는 집 주인이자 지도자인 韓씨의 북 장단에 맞춘다.

개구리타령.팔월가.들노래.진도아리랑이 줄줄이 이어진다. 함께 부르거나 한 소절씩 돌려 부르고, 혼자서 한곡을 모두 부르기도 한다.

노래를 하지 않는 아낙네들은 가락에 맞춰 어깨를 흔들거리거나 엉덩이를 들썩인다. 흥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 이도 있다.

옛날 어릴 적에, 젊었을 때 하던 대로 소리에 치장을 하지 않고 부르니 가락이 가슴에 더 가까이 와 닿는다.

각자 집에서 저녁을 먹은 뒤 모인 게 오후 8시였는데 금방 두어 시간이 지나 10시가 훌쩍 넘었다.

"아이고 뻗쳐라" (지친다는 뜻)는 소리와 함께 판이 잦아들고 소포리의 밤도 이슥해져 갔다. 자리를 파하고 하나둘씩 집으로 되돌아간다.

"신이 나면 유행가들도 부르는디 그러면 11시도 좋고 12시도 좋고 더 늦게까지 놀기도 하제. " 귀에 싫지 않은 농지거리로 계속 분위기를 띄우던 60대 초반 아낙의 귀띔이다.

아주머니들은 이 방을 '노랫빵' (노래방)이라고 부르지만 민요방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벼.대파.고추 농사를 주로 하는 소포마을 주민들의 민요방은 농한기인 동짓달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석달간 문을 연다.

회원은 50대 초반부터 60대 후반까지의 마을 주민 40명. 1백65가구 쯤 되는 마을이니 전체 주부의 4분의 1 가량이 참가하는 셈이다.

이같은 여성 '사랑방' 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전엔 대부분의 시골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정경중 하나였다.

그러나 도시화.산업화가 이뤄지고 이농현상으로 인구가 줄어들면서 점차 사라졌다.

소리 한 대목쯤 하거나 사군자(四君子)를 치지 못하고는 사람 행세를 못할 정도로 풍류가 살아 있는 진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소포리에서 1980년대에 민요방이 되살아났다.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안되겄다. 옛날엔 농악놀이로도, 노래로도 진도에서 제일이었는디 지금은 이게 뭣이다냐. 젊은 놈들은 다 객지로 나가뿔고 사내들은 저러니, 우리 여자들낄라도 한번 해보자. "

이런 분위기 속에서 10여명의 아낙들이 모여 노래를 시작했다는게 韓씨의 회고다. 초기에는 소리 잘하는 선생을 모셔다 배우고 동네 남자들이 북이나 장구를 쳐 주기도 했다.

지금은 가창력이 제일 뛰어나고 최연장자인 '큰 성님(형님)' 韓씨가 선생님 역할까지 맡아 '동상(동생)' 들을 이끌고 있다. 상을 당하면 서로 돕는 호상계(護喪契)까지 같이 한다.

민요방 식구들이 늘어나면서 요즘은 나이 먹고 소리를 잘하는 패와 젊은 패로 나뉘어 번갈아 모임을 갖고 있다.

소포마을 민요방을 연구해 학계에 보고까지 한 목포대 나승만(羅承晩.민속학)교수는 "한 시대의 유행으로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니면서 역사 속에 살아 있는 문화조직" 이라며 "향촌(鄕村)사회 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지표" 라고 평가했다.

진도〓이해석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