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 공장, 고라니를 식구로 맞아들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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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20년 비워둔 공장 빈터에 고라니가 찾아왔다
왜가리·꿩도 둥지를 틀었다
처음엔 쫓으려 했다
이주 대작전까지 폈지만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고라니 한 마리가 19일 충남 서산의 삼성토탈 대산공장 안을 뛰어다니고 있다. 안전을 위해 고라니를 이주시키려던 회사는 방침을 바꿔 공장 여유 부지에 대규모 생태공원을 만들었다. [서산=프리랜서 김성태]

몰아내려고 해봤다. 실패했다. 발상을 바꿔 함께 살기로 했다. 서로에게 좋은 점이 생각보다 많았다. 석유화학회사인 삼성토탈의 대산공장과 고라니들은 그렇게 ‘동거’를 시작했다.

19일 오후 충남 서산의 대산석유화학단지. 삼성토탈 공장에 들어서자 하얀 수증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합성수지 등의 원료인 나프타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오염물질은 없다고 했다. 높이 150m의 거대한 플레어스택(배출가스 연소탑) 꼭대기에선 불꽃이 이글거렸다.

땅으로 눈을 돌리자 풍경이 확 달라졌다. 공장 앞마당의 연못에는 흰뺨검둥오리와 청둥오리가 줄지어 떠 있었다. 공장은 2001년 곧 부화하려는 오리알 3개를 발견한 뒤 이들을 살리려고 연못을 만들었다. 지금은 오리 손님이 9마리로 늘었다.

삼성토탈 공장부지(약 300만㎡)는 1988년 주로 바다를 메워 만들었다. 3분의 1 정도인 약 100만㎡는 확장에 대비해 남겨둔 여유부지다. 웬만한 골프장 하나가 들어갈 넓이다. 20년 넘게 사람 손이 닿지 않다 보니 끝이 안 보일 정도의 갈대·억새 숲이 만들어졌다.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란 나무들도 이제는 키가 제법 컸다. 고라니·너구리·왜가리·꿩 같은 동물도 찾아왔다. 사람이 떠난 비무장지대(DMZ)가 저절로 생태공원이 된 것과 같은 이치다.

공장 사람들을 가장 애먹인 것은 고라니다. 툭하면 공장 안까지 들어왔다. 총무팀 김기창(51) 대리는 “파이프와 벽 사이에 끼여 버둥대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다친 놈도 있었다”고 말했다. 치료해 돌려보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공장시설을 건드릴 경우 큰 사고가 날 가능성도 있었다. 2008년 삼성토탈이 고라니를 인근 황금산으로 보내는 ‘이주 대작전’을 편 이유다. 김 대리는 “200여 명이 북과 호루라기까지 동원해 몰아봤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말했다. 고라니들이 이미 삶의 터전이 된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회사는 방침을 바꿨다. 안전을 위해 일단 공장 시설과 여유부지 사이에 길이 1.5㎞의 울타리를 쳤다. 이어 고라니의 주 무대인 갈대·억새 숲을 아예 생태공원으로 바꿨다. 갈대를 일부 제거해 고라니와 새를 위한 연못을 만들고, 방문객을 위한 탐방로도 조성했다. 인간과 고라니의 공생을 택한 것이다. 총무팀 김진만(53) 차장은 “공사에 앞서 전국의 유명 생태공원 9곳을 돌아봤다”며 “인공 구조물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자연을 그대로 남기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라니는 60마리 정도로 불어났다.

생태공원은 지난해 11월 완공됐다. 남편이 공장의 엔지니어인 장경미(44)씨는 “석유화학회사의 딱딱한 이미지가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고라니 이주에 부정적이던 지역 환경운동가의 시선도 달라졌다. 동물병원장인 김신환(58)씨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을 보고 회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생태공원은 공장 방문객과 지역 주민·학교에 무료 개방된다. 공장 직원이 이 지역의 생태와 전설에 대한 설명도 해준다. 안내 역할을 맡은 원소희(23)씨는 “방문자들이 지루해 할까봐 걱정했는데 무척 즐거워하더라”고 말했다.

글=서산=김선하 기자
사진=서산=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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