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그러운 거머리? 그에겐 난치병의 묘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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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9일 오후 3시쯤 서울 서초구에 있는 대한생물요법학회 한동하(40·한의사·사진) 회장의 진료실.

왼발에 압박붕대를 감은 박영민(40·경기도 부천)씨가 힘겹게 걸어 들어왔다. 그는 5년째 다리 피부의 정맥이 확장되고 비틀리는 하지정맥류를 앓아왔다. 박씨는 “조금만 과로하면 발이 퉁퉁 붓는다”고 토로했다.

박씨가 눕자 한 회장이 벌레 몇 마리를 가져왔다. 거머리였다. “6개월간 먹이를 주지 않아 잔뜩 피에 굶주렸다”고 했다. 환자 발에 6마리를 내려놓자 ‘물 만난 고기’처럼 마디를 연신 움직이며 피를 빨아댔다. 2~3㎝에 불과하던 거머리가 20여 분 만에 10㎝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이윽고 배가 빵빵해진 거머리들이 한 마리씩 떨어져 나왔다. 환자의 발을 소독하던 한 회장은 “6회 정도 더 해보자”고 제안했다.

박씨는 “다른 치료는 별 효과가 없었는데 거머리 치료를 시작한 뒤 상태가 나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회장의 별명은 ‘거머리 박사’다. 거머리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연구열은 남다르다. 국내에서 거머리를 치료에 활용하는 한의사는 10명가량으로 한 회장이 개척자 격이다.

그에게도 어린 시절 거머리는 징그럽게 피를 빠는 흉물이었다. 그가 거머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경희대 한의대 석사 과정이던 1999년부터다. 중(中)의사로부터 “중국에선 거머리가 천식 치료에 사용된다”는 말을 들었다. 곧바로 거머리 추출물의 천식·아토피 치료 효과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제법 큰 약효를 확인하고는 놀랐다고 한다.

그 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강계원 명예교수가 쓴 『잊혀져 가는 생물 거머리』라는 책을 접하고는 거머리를 ‘평생 친구’로 삼았다. ‘거머리의 침샘에선 혈전용해제 원료인 히루딘 등 수십 가지의 생리 활성물질이 나온다’ 등 책 속에 적힌 거머리의 다양한 효능에 이끌려서다.

2004년부터는 ‘내사랑 거머리’라는 블로그를 열어 거머리의 특징과 효능을 알리고 있다. 자연스레 ‘거머리 박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요즘 한 회장은 버거병(말초동맥이 막혀 사지말단이 썩어가는 병)과 당뇨발(당뇨병성 족부궤양) 환자 치료에 거머리를 활용 중이다. ‘절단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버거병 환자 10명에게 2005년부터 거머리 치료를 시도한 결과 8명이나 회복됐다. 당뇨발 환자 10명 중 3명도 완치했다. 그는 거머리를 ‘용한 의사’이자 ‘산업용 동물’로 정의한다. 국내에서 쓰이는 의료용 거머리는 영국·프랑스 등에서 수입한다. 몸집은 토종의 서너 배이고 마리당 가격은 2만원이 넘는다. 국산 참거머리는 흡혈량이 작아 의료용으로 쓸 수 없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04년 의료용 거머리를 수술 후유증을 방지하는 의료 기구로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이렇다 할 법 규정이 없다. 시술비용도 제각각이고 인터넷에서 구입한 거머리로 일반인이 직접 시술하기까지 한다. 한 회장은 “거머리를 함부로 쓸 경우 흉터나 감염 위험이 높다”고 경고한다.

박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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