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 위해 버렸던 공자, 체제 위해 되살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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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호 08면

중국 베이징의 명문대학인 인민대 학생들이 캠퍼스에 세워진 공자상 앞을 지나고 있다. 인민대는 2001년 공자상 건립에 이어 2002년 공자연구원과 국학원을 세워 ‘공자 신드롬’에 앞장서고 있다. 박종근 기자

노(魯)나라를 떠나 천하 유랑을 시작한 공자(B.C. 551~479)가 위나라 영공(靈公)을 만났다.

중국 대륙 휩쓰는 ‘공자 신드롬’의 숨은 뜻

“위나라를 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영공이 묻는다. “노나라보다 인구가 많군요.” 공자의 대답에 영공이 다시 묻는다.
“인구가 많아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어떤 묘책이 없겠습니까?” “백성을 풍족하게 하십시오.”

이에 영공은 “이미 부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회가 불안합니다”라고 말한다. “교화를 베푸십시오.” 공자의 답이다. 이 말에 영공은 손뼉을 치며 즐거워한다.

바로 이 장면이다. 중국이 350억원을 들여 영화 ‘공자’를 만든 진짜 이유다. 이는 『논어(論語)』 자로(子路) 편에 나오는 공자와 염유(<5189>有)의 대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3억 인민의 ‘먹는 문제’를 해결했지만 빈부·지역 격차, 서구문명의 범람, 소수 민족 문제 등으로 사회는 여전히 불안하다. 중국 정부는 공자의 말씀을 뒤졌다. “백성을 가르쳐라.” 자신들이 내팽개친 공자와 유교에 해법이 있었다.

1월 28일자 『요망동방주간』 표지(왼쪽). 이 잡지는 ‘모습을 드러낸 공자’란 제목으로 공자 신드롬을 특집기사로 다뤘다. 오른쪽은 영화 ‘공자’가 개봉된 1월 22일자 ‘신경보(新京報)’. 이날 신경보는 12개 면에 걸쳐 공자 특집을 실었다.

“2500년 동안 공자는 중화문화의 상징이자 중화문명의 정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의 영웅이다. 이 선현을 바로 세우면 중국인의 기개를 드높일 수 있다.” 영화 ‘공자’를 감독한 후메이(胡<73AB>·52·여)의 공자 찬가다. 그는 TV드라마 ‘옹정왕조’ ‘한무대제’를 만들어 역사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후메이는 “2005년 중국 인터넷에 떠돌던 ‘공자는 한국인’이라는 낭설에 자극 받아 ‘공자’를 찍게 됐다”고 동방주간(東方周刊)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가 확산될수록 공산주의 이념이 흔들리고 사람들은 무얼 믿을지 가치관의 혼란에 빠져 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전통문화, 특히 공자와 유교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또 강대국의 조건 중 하나인 소프트파워를 공자에게서 찾는다. 중·대만 통일과 전 세계의 화교 세력 단합을 위해 황제(黃帝)·공자·쑨원(孫文)을 3대 상징 코드로 중시하는 분위기다. 일각에선 모든 성(省)에 공자성(孔子城)을 만들고 공자 탄생지인 산둥성 취푸(曲阜)를 제2의 수도로 만들자는 구상까지 내놓는다.

중국의 공자 열기는 문화혁명의 참담한 전통문화 파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유학은 비록 봉건적인 요소가 있지만, 민주적인 요소도 갖고 있음을 발견했다. 사회가 점차 이성을 회복하면서 공자와 유학에 대한 재평가와 연구가 이뤄졌다. 감정이 배제되자 공자 비판이 사라졌다. 하지만 존중하지도 않았다. 단지 공자를 연구한 것이다.” 중국공자기금회 모우중젠(牟鐘鑒·71) 부회장은 문혁 이후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덩샤오핑이 집권한 79년부터는 국가 차원에서 취푸의 공자묘를 재건했다. 홍위병에 의해 파괴된 유적들이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80년대엔 학계의 공자 재평가가 본격화됐다. 대학자 펑여우란(馮友蘭)은 89년 『중국철학사 신편』을 완간하면서 ‘원수는 반드시 화해로 풀어야 한다(仇必和而解)’ ‘화를 귀하게 여긴다(和爲貴)’는 공자 해석을 내놓았다. 공자 부활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84년 9월 공산당 중앙서기처는 대중학술단체인 중국공자기금회를 만들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는 구무(谷牧: 2009년 11월 사망) 전 부총리를 명예회장, 쾅야밍(匡亞明) 전 난징대 총장을 회장에 임명했다. 구무는 잡지 『공자연구』 발간사에서 “우리 민족문화의 대표를 타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90년대 중반에는 구무를 회장으로 해 국제유학연합회가 만들어졌다. ‘공자 살리기’를 범화교권으로 확산하기 위한 것이다. 취푸 지방정부가 민간단체와 함께 공자 제사를 부활한 것도 이즈음이다. 99년 장쩌민 국가주석은 중국공자기금회와 유네스코가 공동으로 거행한 ‘공자 탄신 255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참가자들을 접견했다.

이후 ‘국학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중톈(易中天)과 위단(于丹)이 중국중앙방송(CC-TV)의 교양프로그램 ‘백가강단’에 출연해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공자 열풍은 ‘국학의 평민화’를 목표로 한다. 누구나 『논어』를 읽을 수 있고 『논어』를 이해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알기 쉬운 논어』의 저자 푸페이잉(傅佩榮·60) 대만대 철학과 교수는 “전통문화의 단절을 겪은 중국 대륙에선 전통 회복의 첫걸음을 공자에 흥미를 갖게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논어심득』을 쓴) 위단의 노력이 첫 단추였다”고 말한다. 위단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자 갖가지 국학 관련 서적들이 서점의 진열대를 장악했다. 학자들은 너도나도 백가강단에 출연했고, 각 지방 방송국은 유사 프로그램을 속속 만들었다. 곳곳에 국학반·경전 암송반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공자 제사열, 공자 생일열, 전통 복식열, 조상 제사열, 전통 명절열, 문화 유산열이 이어졌다.

2002년 11월 중국인민대학은 솔선해서 공자연구원과 국학원을 세웠다. 우한대학·중국정법대학·베이징대학·칭화대학 등도 뒤따랐다. 그보다 앞선 2001년에는 인민대 교정에 공자 동상이 건립됐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30여 개 대학이 공자 동상을 세웠다. 거젠슝(葛劍雄) 푸단(復旦)대 교수는 2007년 취푸를 ‘문화수도’로 만들어 천도하자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한국에서 세종시가 논란이 된 것처럼 중국에서는 공자시 건설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과거제도 폐지 100주년이었던 2005년에는 각종 매체들이 과거제를 재평가하는 특집 기사들을 대거 실었다. 그동안 근대화 실패의 주범으로 낙인 찍힌 과거제도의 부활까지 제기됐다. ‘가오카오(高考: 대학입학시험)가 사실상의 과거’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유가촌(儒家村)·공자촌도 등장했다. 저장성 진화(金華)시 쉬자(徐家)촌은 마을 이름을 유가촌으로 바꾸고 마을 중심의 광장 주위 99m에 공자와 맹자의 어록을 적은 138개의 편액을 세웠다. 광둥성 푸산(佛山)시의 작은 마을 공자촌은 공자 후예의 집성촌이다. 촌장은 공자의 73대 후손으로 알려졌다.

‘공자 신드롬’은 대륙에만 머물지 않았다. 중국은 2004년 서울을 시작으로 5년 만에 전 세계 88개국에 282개의 공자학원을 세웠다. 7일에 한 개꼴로 세워진 셈이다. 지난해 12월엔 87개국, 500명의 공자학원 소재 대학 총장·원장들을 베이징으로 초대해 ‘제4회 공자학원대회’를 열었다. 공자학원은 중국어 보급을 위한 반관반민 기구다. 하지만 중국 문화의 상징으로 공자를 내세웠다는 점이 주목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은 공자 부활의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공자의 3000제자들이 논어 경전을 암송하며 등장했다. 그런 덕인지 지난해 10월 미 하원은 공자 탄생 2560주년을 기념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정상외교를 통해서도 공자란 아이콘을 퍼뜨린다. 2006년 4월 후진타오 주석의 예일대 강연, 2003년 12월 원자바오 총리의 하버드대 강연에서 강조한 중화문명은 모두 공자의 유가 문화를 바닥에 깐 것이다.

의욕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대대적인 공자 띄우기는 영화 ‘공자’ 상영으로 한계가 드러났다. ‘공자’ 배급을 위해 ‘아바타’ 2D판의 상영을 막자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 ‘공자와 아바타의 다툼(孔阿之爭)’ 논쟁이 핫이슈로 떠올랐다. 전황은 공자 진영에 불리하다. 국가급 프로젝트 영화임에도 2월 11일에야 1억 위안(1700억원)의 흥행고지를 달성했다. 2월 11일 개봉한 한국에서는 첫 주말 관객 14만 명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한국 영화 ‘의형제’와 ‘아바타’에 비하면 형편없는 성적이었다. 한국에서 ‘공자’ 상영관은 줄어들고 있다.

중국 학계의 비판도 들린다. “‘공아지쟁’은 권위와 질서를 숭상하는 동방의 농경문명과 개인과 자유를 추앙하는 서방 상업문명 사이에 벌어진 충돌이다. 지금까지 결과로 보면 일부 사람들이 권위주의에 의지해 ‘교화’를 강제로 보급하려는 방법이 인터넷 시대에는 곤란할 것으로 보인다.” 광저우 지난대학(<66A8>南大學) 허즈쥔(何志軍) 교수의 평가다. 정부 주도의 공자 부활 프로젝트가 평탄할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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