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이 좋다] 부산 해초·비린내… 마음이 편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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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약수동 산비탈의 한 판자집에 사글세방을 얻어 서울 진입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60년대 중반,같은 시기에 제대한 친구랑 둘이서 투지를 불태우며 취사도구로 중무장하고 진지를 구축했다.그러나 서울은 비정하고 냉혹했다.

라면조차 끓이지 못해 이틀을 물만 마시며 지낸 적도 있었다. 통행금지가 임박한 시각 버스비가 떨어져 서울역에서 자취방까지 한밤의 마라톤을 감행하기도 했다.

10대에 가장이 된 나는 부산에 두고 온 세 식구는 두고라도 내 한 몸 간수하기 힘들었다.친구의 사정도 비슷했다. 결국 1년만에 백기 든 패잔병으로 후퇴해온 우리들에게 서울은 사무친 원한이 되고 말았다.

사람은 나면 서울이라고,작은 야망이라도 가져본 사람이라면 서울 진출을 꿈꾸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지방이 좋다는 소리는,적어도 한국에서는 패배자의 위안처럼 들린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현실은 현실이다.

지금 그 친구는 마산에서 나는 부산에서 늙어가고 있다. 삼십여 년 함께 사는 마누라처럼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이제 부산은 내 몸과 정신의 일부가 돼버렸다.

일본서 태어나 진주서 유년기를 보내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왔으니 부산에서 반세기를 산 셈이다.그만하면 토박이라 해도 핀잔할 사람은 없을 터. 동창들 대부분 부산에 있고,이리저리 고리 맺은 많은 인연들이 거의 대부분 부산에 있다.

부산의 어느 곳도 내 지난날의 회억의 그림자가 깃들이지 않는 곳이 없다.어쩌다 먼 여행길에 올랐다가 부산이란 글자만 보이면 금방 가슴이 따스해 진다.

부산,부산은 내게 상처이고 영광이다. 최초로 나의 작은 꿈을 이루게 한 곳이 부산이다.또 그 꿈의 날개를 접게 한 곳도 부산이다. 서울이 내게 입힌 치욕에 대한 앙갚음이기도 하겠지만,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서울 중심과 편중의 현실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사람에 속한다.

지금은 열렬한 지방분권 예찬론자가 되어 중앙정부를 향해 난사할 총구를 겨누고 있는 중이다.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다.나의 자식놈이 세칭 서울 일류대학을 나와 여의도에서 자리잡고 있어서이다. 놈은 부산으로 돌아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나는 부산이 좋다.부산을 떠나서는 어디서건 도무지 편하지가 않다.제아무리 도원경 같은 곳도, 되돌아오는 길에 반겨주는 먼 부산의 전경을 바라볼 때, 바로 그때만큼 즐겁고 안온하지가 않다.

고기 비린내와 해초와 소금냄새가 적당히 섞인 부산의 향기를 맡을 때야 비로소 숨쉬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부산, 부산은 내 사랑이다.

신태범<소설가.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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