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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재래시장의 어제와 오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길가의 가게와 집은 서로 붙어있다시피 한 단층집들이다. 가게는 좁아서 주인들도 그 속에 들어가 앉을 수 없었다.

주인들은 밖에 놓은 작은 마루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손님이 필요한 것을 말하면 가게 안 시렁 위에서 물건을 꺼내왔다.

두 손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어떻게나 잘 아는지 놀랄 수 밖에 없다. 상품은 종류가 다양하고 풍부했다. "

19세기 말 서울에 왔던 미국인 에드먼드 공군 하사의 기행문에 나타난 서울의 시장 풍경이다.

시대는 변해도 시장 속 삶의 열기는 변함이 없다. 특히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재래시장은 더욱 그렇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행정구역상으론 중구)을 비롯, 황학동시장.중부시장 등 재래시장이 밀집해 있는 서울 중구는 21일 '중구의 시장, 어제와 오늘' 이란 책을 펴냈다. 책에는 서울의 재래시장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들로 가득하다.

◇ 6백년 역사의 남대문시장=중구 남창동 2만여평에 자리잡은 남대문시장은 문헌상으로는 6백년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 사대문안 주민들의 생활품과 관수품 공급을 위해 새 도읍지인 한양의 남대문 근처에 시전(市廛.관 지정 상인)행랑을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것이 시초.

그러나 조선시대에 남대문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7세기 도성내 난전(亂廛)상인들이 관의 규제를 피해 사대문밖 칠패(七牌.지금의 봉래동)로 몰려들면서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선조 41년(1608년)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쌀을 보관하는 창고인 '선혜청(宣惠廳)' 이 지금의 남창동 지역에 설치되면서 이 일대는 객사와 주막이 번창했고 자연스레 시장으로 발전하게 됐다. 남창동과 북창동이란 지명도 창고가 있던 자리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남대문시장은 1912년 이완용(李完用)내각의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이 '조선농업주식회사' 를 설립해 장남을 사장으로 앉히면서부터 근대적 경영체제를 갖추었으나 그 후 일본인 손으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남대문시장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6.25 이후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이 일대에 월남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군복과 담요, C레이션 박스 등을 닥치는 대로 팔면서 상권을 장악했다.

남대문시장이 '아바이시장' 으로 불리면서 '이곳에 가면 박격포도 살 수 있다' 는 말이 나돌던 것도 이 때.

한때 남대문시장 상권의 70%를 장악했던 실향 상인들은 이제 점차 젊은 세대로 바뀌고 있다. 현재 남대문시장은 1만여개의 점포에 하루 30만명 이상이 출입하는 '세계적 재래시장' 이자 관광명소로 발돋움했다.

◇ 민족시장 자존심 지킨 동대문시장=지금은 거대한 패션타워로 변해버린 동대문시장은 1905년 설립됐다.

물론 조선시대 '배오개시장' 이 뿌리를 이루지만, 근대적 모습은 종로상인들이 '광장주식회사' 를 세워 동대문시장을 관리하면서부터다.

일제시대 일본상인들이 경영권을 장악, 우리 상인들의 판매권을 제한했던 남대문시장과는 달리 동대문시장은 상인조합이 결성돼 조합원들 누구나 물건을 내다 팔 수 있었다.

◇ 고물시장이 만물시장된 황학동시장=뽀얀 먼지가 쌓인 곰방대, 삭아가는 맷돌, 호랑이 이빨 목걸이, 목화씨를 뽑아내는 씨아…. 없는게 없어 '만물시장' 으로 불리며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 황학동시장은 일제시대 땐 청과시장이었다가 6.25후 고물들이 몰려들며 중고품 전문 시장이 됐다.

70년대에는 미술품.골동품 가게도 많았으나 이들 상점은 장안평.인사동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엔 전자제품, 기계부품 가게들이 들어섰다.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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