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일’보다 ‘말’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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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번 싸움은 시작부터 정책문제가 아니라 권력투쟁이었다. 정책이라면 이렇게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정책은 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대안 모색과 조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권력싸움은 본능의 싸움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켜 설 곳이 없다. 권력싸움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3년상을 치르든, 1년상을 치르든 사실 그것이 무슨 큰 문제였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권력투쟁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예송론(禮訟論, 조선 현종시대)으로 죽기 살기 싸움을 했던 것이다. 옛말로는 권모술수요, 요즘 말로는 정치공학이다. 청와대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상대가 세종시를 정치공학 차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오해를 살 충분한 이유도 있었다. 잠재적 경쟁자가 될 새 총리가 세종시를 밀어붙이니 오해를 하는 것이다. 세종시 문제를 풀려면 이 같은 권력투쟁의 성격을 순수한 정책문제로 전환시켜야 한다. 세종시를 그 내용 자체로 검토해야지 차기 구도의 문제나 계파의 권력과 연계시켜서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일 잘하는 사람을 밀고 싶다’ ‘빌 게이츠가 나를 보고 수퍼 비지맨이라고 했다’는 말들은 그의 심정을 잘 말해 준다. 그는 생래적으로 ‘말’을 불신하고 ‘일’을 덕목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4대 강 사업이나 청계천 사업은 다 ‘일’이다. 어쩌면 이번 사태도 일을 앞세우다 빚어진 일인지도 모른다. 수도를 분할해서는 안 된다는 점만 머릿속에 꽉 차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프로젝트를 해내는 것이 정치의 본령은 아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일’보다는 ‘말’을 하는 직업이다. 여기서 ‘말’을 한다는 것은 겉치레 말잔치를 뜻하지 않는다. 말은 이성의 도구다. 말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다.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본질이 ‘말’인 것이다. ‘일’만이 목표라면 민주주의는 효율적인 제도가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문제의 해결은 ‘말’을 회복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두 사람 간의 말도 필요하고, 한나라당 내부의 말도 필요하다. 진심 어린 말은 우리를 공감시키며, 이를 바탕으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세종시가 정말로 권력 차원의 의도가 아니고 순수한 ‘일’의 차원이었다면 이를 ‘말’로써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 내부도 ‘말’을 회복해야 한다. 이미 입장이 다 정해졌으니 “토론이 필요 없다”는 말처럼 오만한 말은 없다. 그렇다면 정당과 국회는 왜 필요하며, 민주주의는 왜 하자는 것일까. 제대로 된 ‘말’을 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따른다. 우선 적대감이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권력의 본능은 뒤에 두어야 한다. 그다음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모두 이 나라를 위한 견해라는 점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자면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이 바탕에 있어야 한다. 절차도 중요하다. 다수결도 중요하지만 소수의 의견도 경청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확인해야 한다. 시한을 정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일이 일 년 늦어진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간이 진실을 드러내 줄 수도 있다.

의원들의 정체성 회복도 필요하다. 한 사람 눈치만 보며 따라다닐 것이면 그 한 사람이면 족하지 수백 명의 의원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의원은 계파의 일원이기 전에 자기 판단으로 국민을 대변하는 독립자다. 양쪽 모두 이런 의식을 가진다면 얼마든지 새 조정안도 나올 수 있다. 세종시 문제가 죽기 살기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야당의 국회 폭력에 대해 비난한다. 그러나 스스로는 당 내부의 의견조차 모으지 못할 정도로 갈라져 있다. 그러면서 다른 당의 폭력을 비난할 처지가 못 된다. 권력정치로는 국민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정치의 본질이 권력투쟁이라고는 하지만 권력싸움만 부각될 때 정치는 국민과 멀어진다. 말을 회복해 멋진 대타협을 만들어 보라. 이번이 그런 기회일 수 있다. 우리는 감동의 정치를 보고 싶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