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5共식 부실정리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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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민의 정부와 제5공화국은 닮았다' .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펄쩍 뛸지 몰라도 그렇지만도 않다.

적어도 경제에 관한 한 두 정부는 비슷한 점이 많다. 양쪽 모두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서 출발했다.

또 5공(국보위 포함)이 자동차와 발전설비 일원화에 맨 먼저 손을 댄 것처럼 현 정부의 첫 산업정책도 반도체.석유화학 등 7개 산업의 빅딜이었다.

둘 다 과잉투자 해소가 목적이었다. 이밖에도 회장 비서실 폐지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선출과정 개입에 이르는 재벌정책 등….

*** 진행 과정 현재와 흡사

현 정부 역점과제 중 하나인 부실기업 정리는 특히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다. 사실 이 분야는 5공이 원조 격이다.

지난 1986~88년 초 무려 5차에 걸쳐 대대적인 부실기업 정리가 이뤄졌다. 경제관료들과 금융계 베테랑들이 밀실에 모여 살생부(殺生簿)를 만들었고, 장관들은 이 명단을 들고 부실기업 세일에 나섰다.

여기에는 한국은행 특별융자란 극약처방도 동원됐다. 공중분해된 국제그룹 계열사를 비롯한 57개 기업이 이 과정에서 문을 닫거나 주인이 바뀌었다.

국민의 정부에서도 비슷한 드라마가 리바이벌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단행된 두차례의 부실기업 정리를 통해 동아건설 등 1백7개 기업이 정리됐다. 또 5백개가 넘는 금융기관들이 정리됐으며 지금도 후속작업이 진행 중이다.

등장인물이나 규모는 다르지만 사안의 전개과정이나 동원되는 수단도 비슷하다. 예전의 특융 대신 이번에는 공적자금이 동원됐다.

밀실에서 이뤄진 살생부나 투명성.일관성이 결여된 잣대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5공의 청산.법정관리 대신 이번에는 화의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 자주 등장했다.

하긴 등장인물이 완전히 낯설지도 않다. 이헌재(李憲宰).강봉균(康奉均)전 장관을 비롯해 진념(陳稔)장관이나 이기호(李起浩)경제수석 등은 모두 옛 기획원.재무부에서 잔뼈가 굵었거나 5공의 부실기업 정리 때 직간접으로 참여한 인물들이다.

십수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 대응책으로의 부실기업 정리는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면 두 드라마의 결론은 어떻게 매듭지어질까. 5공의 경우 운이 좋았다.

바로 '3저(低)호황' 이 오는 바람에 경기가 급속도로 좋아졌고, 그 덕에 숱한 무리수가 큰탈 없이 - 나중에 터졌지만 - 넘어갔다.

이번에도 비슷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결과는 극히 불투명하다. 세상이 달라졌다. 모든 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5공과 달리 지금은 시장에서 정부의 말발이 거의 먹혀들지 않는다.

조금만 이상하면 외국에서 바로 견제가 들어온다. 결정적으로 노동계를 중심으로 한 이해집단의 욕구분출은 사사건건 정책추진과 국정운영에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한다.

설상가상으로 대외여건까지 어렵다. 옛날과 수단.과정은 비슷한데도 최근의 부실기업 정리가 계속 꼬이는 이유가 이런 차이점 때문이다.

문제는 또 있다. 사실 5공식 부실기업 정리는 그 자체가 무리수였다. 처리를 계속 미루다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는 상황이 되자 동원한 긴급처방이지, 되풀이해서 사용할 수단은 아니었다.

다행히 3저 덕에 덮여 넘어갔지만 근본적인 문제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3저 약발이 떨어지자 바로 문제가 다시 불거졌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 주인이 바뀐 경남기업.우성건설 등은 아직도 부실을 면치 못하고 있다.

*** 몰아치기 방식 더는 안돼

현정부의 실책은 이런 차이점을 간과했으며, 5공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데 있다. 옛날 생각에 과거 방식만 고집하다가 2년여를 허송세월했고 지금도 똑같은 착각과 실수를 거듭하고 있다.

그 결과가 구조조정의 실패다. 현경제위기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2차 기업구조조정도 이미 실패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부가 공언한 '연내 금융.기업 구조조정 마무리' 도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이대로 가면 1백10조원뿐 아니라 추가조성한 40조원까지 허공에 뜰지 모른다. 더 이상 5공식 '몰아치기' 구조조정은 안된다.

투명하고 일관된 기준으로 제때 제때 처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정책담당자와 정치권의 인식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정 안되면 사람을 바꾸든지.

김왕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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