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고향길에 불러보는 우리의 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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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정지용이 그리던 옛 고향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변한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설이나 추석명절이 오면 우리 국민 대다수는 부모나 가족을 찾아 고향길에 오르게 마련이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명절은 막연한 향수를 느끼게 해 준다. 향수란 내가 자라고 살았던 공간적 고향과 내가 살아오고 경험했던 시간적 고향에 대한 본능적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옛날 내가 살던 곳을 향한 고향길이든 마음의 고향으로 향한 회상이든 새로운 시작인 설은 우리의 삶에서 정말 소중하게 아끼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짚어보게 되는 귀중한 시간임에 틀림없다.

참으로 바쁜 세상이 되었다. 국내에서든 세계시장에서든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에 우리는 지난 몇십 년 빠른 속도로 뛰어왔고 지금도 계속 뛰어가고 있는 중이다. 많은 것을 성취하였지만 더 큰 성공을 위해선 쉬지 않고 뛰어갈 수밖에 없는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왜 그곳으로 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뛰는 것일까. 만약에 지금 우리가 뛰고 있는 방향이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결국 목적지의 방향은 크게 틀어질 것이며 그로 인해 큰 손해나 재앙에 직면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라도 잠시 질주의 속도를 조정하고 숨을 돌려 우리가 진정 아끼는 것은 무엇이며 가고자 하는 방향은 어느 쪽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사실 그러한 여유는 개인이건 국가이건 건강한 생존을 위한 필수요건인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디로부터 뛰어왔는지를 되짚어 보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올해는 4·19-50주년, 5·18-30주년, 6·25-60주년, 경술국치-100주년 등 지난 한 세기에 걸친 우리 민족의 집단적 경험을 되돌아 볼 계기가 한꺼번에 몰려 있는 해다. 워낙 거센 역사의 파도와 우여곡절을 겪어왔기에 지난 100년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는 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기억만 주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오늘의 우리 형편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기에 설날 고향길에 오른, 또는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에 잠긴 우리들은 지금보다 더 밝은 내일이 올 것을 기대하며 민족적 명절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는 것이다. 이 작은 명절의 여유 속에서라도 우리의 민족공동체가 함께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국민적 힘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0년 격동하는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는 무엇을 잃었으며 무엇을 찾았는가를 되짚어 보면 비교적 간명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나라의 주권과 국민의 자유였다. 그러기에 우리의 독립운동은 이 나라가 독립국이며 이 민족이 자주민임을 되찾는 고난의 길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우리는 눈부신 성취의 역사를 일궈냈으나 분단과 전쟁을 겪어낸 반쪽의 성공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우리 민족은 지난 100년 동안 한 번도 통일된 독립국가에서 살아보지 못한 유일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바로 그러한 비극적 운명에 굴하지 않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하였기에 우리는 자부심을 갖고 내일을 바라보며 이번 설날에도 고향길을 재촉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걸어 온 역정은 자유를 지키며 키워오는 데 온 국민의 노력이 결집되었던 위대한 성공의 역사였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무지(無知)로부터의 자유,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비굴로부터의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렀는가. 그러나 우리의 자유가 진실로 충만하기 위해선 앞으로 나아갈 길이 아직 멀다는 것도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국민의 집결된 힘으로 모범적 선진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고착된 남북 분단 상황은 올해도 숙제로 남아 있다. 광복과 6·25를 겪으며 북한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500만 실향민, 이제는 고향을 떠나 4대로 이어가며 남쪽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애절한 향수는 곧 우리 모두의 아픔이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더해 북한의 2300만 동포들의 운명은 어찌할 것인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면 할수록 답답함이 더해가는 대목이다. 그러기에 7000만 동포가 다 함께 잘살 수 있는 통일된 조국을 꿈꾸며 민족공동체 건설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응분의 희생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하는, 정말 가슴이 따뜻해지는 고향길이 되길 바란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