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새치기와 곰바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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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토요일 오후 서울 시내 내부순환도로에서 진땀을 뺐다. 홍은동 길목으로 빠져 나가려는 차량행렬이 1㎞쯤 늘어선 채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사고가 났나. 가는 둥 마는 둥 앞차 꽁무니를 쫓아 열심히 따라가다 보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옆줄로 신나게 달려온 차량들이 맨 앞쪽에서 너도 나도 끼어들기를 한다. 줄지어 온 차량들이 바싹 바싹 붙어보지만 새치기 차들은 용케도 틈을 비집고 들어선다.

*** 낙하산 인사 개혁 걸림돌

저런 얌체들. 저 ×들 때문에 줄이 줄어들지 않았구나. 울화통이 치밀고 욕이 절로 나온다. 30분씩이나 줄지어 기다린 우리는 뭔가.

뭐긴 뭐야 곰바우지. 하긴 끼어들기.새치기가 어디 여기뿐인가. 우리네 사회 곳곳이 새치기.끼어들기판인데. 엊그제 옷 벗은 박금성(朴金成)전 서울경찰청장도 따지고 보면 같다.

남들은 6~7년 걸린다는 승진 길을 그는 2년8개월 만에 정복했다. 실력과 능력이 출중해서 그렇게 됐다면 경찰내 뒷말이 그토록 무성할 리 없다. 왔다갔다한 학력사항만 보더라도 그렇다.

소문대로 힘있는 실세(實勢)가 뒤를 밀어줬거나, 아니라면 최소한 요즘 잘 나가는 고향 덕을 본 게 틀림없다.

실세 또는 지연(地緣)을 업고 정상적인 과정을 몇 단계씩 뛰어 넘은 셈이니 새치기나 다름없다.

추월당한 인사들의 심사가 어땠을까. 차량 새치기당한 울화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權魯甲)최고위원이 요즘 난처하게 됐다.

그런데 그 측근의 옹호발언이 재미있다. "낙천자들, 오랫동안 대통령과 민주화운동을 했으나 정권교체 후 소외된 사람들에게 산하 기관에 자리를 알선해준 게 오해를 불렀다. " 그것도 낙하산 인사 논란이 분분해 1백명도 못했다며 억울하다는 식이다.

그 '1백석' 을 향해 묵묵히 일해온 사람들의 허탈감을 한번쯤이라도 헤아려 봤을까. 낙하산 인사야 말로 전형적인 끼어들기다.

공기업.산하기관을 전리품 삼아 낙천자와 옛 동지들에게 보상책으로 마구 임명한 게 공기업을 멍들게 했고, 지금은 구조조정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른바 양갑(兩甲)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마련된 동교동계 11인 모임에서 權위원은 물었다. "너 국회의원 하려고 비서생활 했나. 너는, 너는?" 모두들 "아닙니다" 고 복창했다.

그들처럼 낙천자나 '옛 동지' 들도 공기업에 취직하려고 민주화 운동을 하고 공천신청을 한 게 아닐 것이다.

내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 다른 사람에겐 피눈물이 되고, 사회를 골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걸까. 차량의 끼어들기가 교통질서를 어지럽힌다면 공직인사 새치기는 공직풍토를 교란해 결국 국기문란으로 이어진다. 오늘의 정권불신도 거기서부터 비롯됐다.

낙하산 인사 한가지만으로도 權위원은 책임이 크다. 그래서 그 문제를 제기한 약관 정동영(鄭東泳)최고위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鄭위원은 "權위원은 결백하지만, 온갖 소문이 나돌고 있다" 며 2선 후퇴를 권유했다. 대통령과 權위원 당사자 면전에서 할 말을 다 했다니 정말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런데 '결백과는 무관하게 온갖 소문' 이 나도는 이들이 權위원 한사람뿐인가. 대통령 아들들을 비롯한 친인척들도 이런저런 소문을 달고다닌다. 민주당 인사들도 걱정할 정도다.

*** 권력 통한 샛길 없애야

인사 뒤끝엔 모장관은 누구의 고교동창이라느니, 누구와 어떻게 걸린다느니 하는 소리가 심심찮다.

동방금고 사건 때의 KKK 중에도 포함돼 있었다. 무관할지 몰라도 鄭위원이 지적한 '결백하지만 소문이 나도는' 경우엔 해당된다. 문제는 똑같은 상황인데 그들에 대해선 아무런 직언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성역이 존재한다는 의구심을 낳는다.

대통령의 국정 쇄신책에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다. 주문이 많고 기대가 워낙 크다 보니 부담도 클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끼어들기.새치기 풍조 한가지만은 꼭 바로잡아 주길 고대한다. '온갖 소문' 의 내용들이란 인사든 이권이든 모두 권력을 동원한 새치기요 끼어들기에 관한 것이다.

일반인들은 권력이 통하는 샛길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게 차단되지 않고선 신뢰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성역이 보호돼서도 안된다. 묵묵히 차례 지키며 살아가는 선량한 국민을 곰바우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허남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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