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상무팀 꼭 없애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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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시드니 올림픽 펜싱에서 금메달을 따내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떨친 김영호 선수는 1992년말 '운좋게' 입대했다.

국내에서도 그저 그런 선수였던 그는 국군 체육부대(상무)에 배속되면서 펜싱과의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고, 제대 후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마침내 세계 정상에 올랐다. 당시 동료선수들 가운데 상무에 입대하지 못한 선수들은 결국 운동을 그만 뒀다.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럭비 선수들은 숙적 일본을 잇따라 꺾고 금메달 2개를 목에 걸면서 병역 면제혜택도 받았다.

그러나 오라는 실업팀이 없어 이들은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해서라도 운동을 계속하고 싶어 고민했다.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멀쩡한 육신에 칼을 대 병역비리로 형사처벌을 받는 일부 프로선수들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국 스포츠의 생명줄이나 다름 없는 국군 체육부대가 해체된다고 한다. 최근 조성태(趙成台)국방부 장관은 국회 국방위에서 "군 구조조정 차원에서 체육부대를 해체하겠다" 고 밝혔다.

趙장관은 현재 대부분 비인기 종목인 26개 종목 선수 3백여명으로 구성된 체육부대를 올해 말부터 점차 줄여나가 2002년 월드컵을 치른 뒤에는 아예 없애 버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즉 앞으로 제 아무리 세계 정상을 넘볼만한 국가대표급 선수라도 일단 현역병으로 입대하면 일반 사병과 함께 총을 들고 경기장대신 연병장에서 땀을 흘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툭하면 불거졌던 상무 해체설이지만 체육계의 반발은 거세다. 그동안 해체설이 나돌 때마다 할 수 없이 일부 종목을 제외하는 선에서 타협해왔으나 이번에는 주무 장관이 완전 해체 의지를 밝혔기 때문에 체육계가 받는 충격은 더욱 크다.

한창 인생의 밑그림을 그려나갈 시기인 이십대 초중반은 운동선수들에게 더욱 중요하다. 체력이 뒷받침되는 나이인 만큼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쑥쑥 늘기 때문에 이 때를 놓치면 사실상 선수로서 생명을 포기해야 할 정도다.

가뜩이나 국내 스포츠 기반이 취약한 마당에 한 가닥 선수의 생명이 걸린 국군 체육부대마저 해체될 경우 한국 남자 스포츠는 더 이상 국제무대를 넘보기 힘들어진다.

이런 국내 체육계의 절박한 현실을 감안할 때 국방부의 구조조정이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상무까지 해체해야 할 정도는 아닌 듯하다.

체육부대의 1년 유지비는 40억원 남짓해 무려 14조원이 넘는 올해 국방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수천억원 상당의 무기 도입 로비 의혹은 제쳐 두더라도 돈잔치가 한창인 프로야구 올해 자유계약선수 두명의 몸값 밖에 안되는 딱한 처지다. 인원으로 따지면 전체 69만여 병력 가운데 3백여명에 불과하다.

국군 체육부대 해체가 국방예산 절감 차원이 아니라면 무엇보다 우리 병무정책의 경직된 시각이 느껴진다.

'신성한' 국방의무를 다하려면 '×라면 ×야지' 라는 식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군에 입대하는 우리 젊은이들은 한때 젊음을 유보하더라도 자신의 인생까지 휘둘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따라서 상무가 해체되면 앞길이 막막해지는 선수들처럼 조국의 부름을 받은 젊은이들의 앞날이 굴곡지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 병무정책이 나갈 방향이다.

지난날 유행했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내 청춘' 이라는 노래를 애절하게 부르며 군문을 나서는 '어둠의 자식' 들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최천식 <체육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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