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돈보다 꿈이 좋아" 일에 미친 열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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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자락 1만평을 깎아 도깨비 공원을 만드는 10인. 누구는 번듯한 직장을 걷어치우고 여기 와 무보수로 일한다. 두목 격인 교수는 아예 현장 컨테이너에서 자면서 오전 6시부터 흙일을 했다. 예술의 품격이 느껴진다며 틈나는 대로 쓰레기를 주워 모으는 괴짜도 있었다. 그들 스스로도 서로를 "좀처럼 보기 힘든 개성파들"이라고 했다. 몸을 바쳐 산을 공원으로 바꾸는 힘든 작업을 그들은 "초일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이해했다. 괴짜들이 모여 하는 지옥 훈련. 이를 보고 그들이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건 지나친 비약일까.

#'대장' 도깨비 - 이기후 교수(51)

뜻밖이었다. 자기 집까지 판 데다 제자들과 함께 3년 가까이 땀을 흘린 공원인데도 "공원 자체는 내 꿈이 아니다"라고 했다.

"진짜 꿈은 이 테마파크 만드는 경험을 통해 함께 있는 친구들을 초일류 디자인 군단으로 키우는 겁니다. 그래서 또 다른, 진짜 일류 작품들을 계속 만들어 나가는 거지요."

실제 공원은 학생들에게 건물과 전시품뿐 아니라 조명.조경까지 직접 만드는 경험을 선사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현장에 적용 가능한 디자인, 그리고 현장에 어울리는 디자인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있었다. 교수는 또 일하는 제자들에게는 자기를 '사장'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스태프'라고 칭했다.

"그렇게 회사 같은 분위기를 풍겨야 관광객들의 흥미를 끄는, 다시 말해 '돈 되는' 공원을 만들게 된다"는 이유였다. 하나를 디자인 해도 그렇게 '팔릴' 것을 만들어내는 게 프로 의식이라고 했다. 1989년 교수가 되기 전, 대우전자 디자인실에서 익힌 철학이다. 공원 만드는 과정에서 그런 프로 의식이 학생들의 몸에 배게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공원 운영 수익이 자기 자식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지는 않겠단다.

"고3, 중3 아들 둘이 있어. 여기서 일을 시켜봤는데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는 거야. 저게 내 새끼 맞나 했지. 여기 수익은 철저히 여기서 땀 흘린 스태프들의 몫이 될 거요. 내 수익? 다음 작업에 투입하는 거지."

# 전직 전자제품 디자이너 - 윤상호(43)

올해 5월 이 교수의 전화 두 통에 합류했다. 유명 전자회사의 휴대전화 단말기 등을 디자인 해주던, 잘 나가는 서울의 개인 사무실을 접고서였다. 이 교수의 첫 전화는 "때려 치우고 내려와라"였고 두번째는 "언제 내려오느냐"였다고 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인생을 확 바꿔보고 싶었죠. 컴퓨터 앞에서 전자제품 디자인 하는 것과 흙에서 뒹굴며 공원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르니까."

처자식이 있는 그도 학생들처럼 현재는 임금을 받지 않고, 나중에 수익을 나눠 받기로 했다.

이 교수와는 대우전자 디자인실에서 함께 일했던 사이. 부인도 이 교수가 소개시켜줬다.

# 오전엔 강의 오후엔 막노동 - 현재범(30)

오전엔 우아한 대학 강사, 오후엔 막노동 차림의 도깨비 공원 일꾼. 스태프 중 최고령인 현씨는 이런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2000년 대학을 졸업한 뒤 큰 물에서 놀겠다며 대학원은 서울에서 다녔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던 2002년 8월, 잠시 제주도에 들렀을 때 이 교수가 함께 술 한잔 하자고 했다. 그리곤 팀에 들어와 어린 학생들과 자신의 사이를 이어줄 중간 책임자 역할을 맡아달라고 했다. 논문이 남았지만 바로 제주행을 결정했다. 꿈인 '테마파크 기획자'로서의 훈련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현장 일을 하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논문 심사를 통과했다. 2003년부터는 모교인 제주대 산업디자인학과에서 시간 강사로 일한다. 학교에 들어간 이유는 한가지. 바로 이곳에 투입할 새싹들을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스카우트 실적은 0.

#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몰라 - 박치완(27.석사 1년)

다른 스태프들이 이구동성으로 '도깨비 중의 도깨비'로 꼽았다. 느닷없이 매직으로 자기 몸에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동료 생일에 나이만큼 생선 대가리를 구해서는 입마다 초를 꽂아 들고 나타나기도 했다. 갑자기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 앞부분만 남은 오토바이 잔해, 계란껍질 등등을 주워다 수집해 놓기도 한다.

"어느 날 집에 가다 교수님과 마주쳤는데 도깨비 공원 말씀을 하시기에 합류했어요. 뭔가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들어서였죠. 여기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색다른 경험을 찾아볼 겁니다. 그런 것들이 저를 최고 디자이너로 만들어 줄 거라 믿어요."

# "내 한계를 알고 싶다" - 강혜영(22.4년)

시멘트가 덕지덕지 붙은 운동복 바지, 색 바랜 운동화, 바싹 그을린 얼굴에 터진 입술. 천상 공사판 잡역부 아줌마 차림이지만 가까이 가서 모자를 들춰 보니 20대 초반의 앳된 모습이 나타났다.

"부모님이 이런 모습을 보시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아예 거지꼴이구나' 하시더라고요."

이 교수가 함께 일하자고 전화했을 때, 그는 극기 훈련을 해보듯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 보려고 주저없이 뛰어들었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묻자 "이렇게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남자친구가 생기겠느냐"며 "내년 3월 개장만 하면 매일 소개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마우스보다 삽질 - 박관태(26.석사 2년)

모두들 그를 '터미네이터'라 불렀다. 일을 하나 맡기면 밤을 새워 가면서 완벽하게 끝내놓는 철저함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올들어 쉰 날은 단 하루뿐. 설날 당일 차례를 지내기 위해 하루 빠진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일하다보니 허리 디스크가 생기는 등 건강이 많이 상했다. 덩달아 학점도 상했다.

"남들은 컴퓨터 앞에서 쥐(마우스)만 잡고 있는 동안 전 망치.삽.조명등까지 여러 개를 잡았잖아요. 학점은 좀 떨어져도 그만큼 앞서 나간 것 아닌가요."

# "바깥 일은 내 손 안에" - 김애정(26.3년)

뒤늦게 대학에 와 이제 3학년인 이 처녀. 도깨비팀의 대외 창구다. 토지 문제로 관청을 상대하는 것, 공사 재료 납품 업체를 정하고 협상하는 것 등등이 모두 그의 몫이다. 대학에 오기 전 통신회사 영업팀에서 일하며 사람들을 많이 대한 경력 때문에 이 역할을 맡았다. 수시로 휴대전화기 잃어버렸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늘 가방 안에서 발견된다고.

# 말 보다는 행동 - 좌혜선(22.3년)

돌부처다. 도통 말이 없다.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할 때면 중장비가 달려와 빵빵 거려도 요지부동. 일이 힘드냐니 조용히 때가 낀 손톱을 들어보였다.

# 분위기라면 맡겨줘 - 박재광(25.4년)

185㎝의 훤칠한 키에 텁수룩한 수염. 자칭 정우성 같은 분위기파라지만 모두들 '호들갑의 1인자'로 지목했다.

# 작은 몸에 황소 힘 - 진윤심(22.올 2월 졸업)

자그마한 체구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쏟을 것 같은 황소 같은 눈망울. 하지만 잠긴 화장실 문을 좀 세게 밀었더니 문이 부서졌다는 천하장사다. 도깨비 공원의 건물 90% 이상을 그가 디자인했다.

제주=권혁주.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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