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서도(書道)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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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퇴임후 강호를 유유히 넘나들며 묵향 속에서 글씨나 쓰면서 시인묵객(詩人墨客)처럼 살리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 그제부터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자신의 서도전(書道展) 개막식에서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이 한 말이다.

그의 인사말은 "그러나 퇴임후 세상은 날 산하를 벗삼고 묵향에 침잠하는 시인묵객으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로 이어진다.

행사를 가리켜 "YS의 '서도(書道)정치' " 라고 설명한 참석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퇴임 대통령에 서도까지는 좋은데 거기에 정치란 말이 끼어드니 왠지 어색하다.

서도는 일본식 표현이다.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고 한국에서는 서예다. 어떤 것이든 동양문화의 진수 가운데 하나다.

단순히 예쁘고 아름다운 서체를 뜻하는 서양의 캘리그래피(calligraphy)와는 차원이 다르다. 펜과 붓의 차이라고나 할까. 자기완성의 도(道)를 좇는 선비들은 붓을 움직여 화폭에 사군자(四君子)를 치고, 법첩(法帖)을 임모(臨模)해 자신의 서필을 가다듬었다.

묵향을 가까이 하는 것은 군자(君子)된 도리였다. 그래서 서도는 단순한 기술일 수 없고 그 자체가 도를 닦는 수련이고 예술이었다.

연말연시면 대통령 등 권문세가가 쓴 신년휘호가 각 신문 지면을 장식한다. 큰 정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친필휘호 하나쯤은 쓸 줄 알고 남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지금도 많은 모양이다.

JP 같은 정치인은 때때로 알쏭달쏭한 휘호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기도 한다. '일상사무사' (日常思無邪 : 평소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가 지난해 초 그가 쓴 휘호였다.

정치인이 남긴 휘호의 값어치는 단순히 서도의 수준만으로 평가되지는 않는 것 같다.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이 쓴 '근검절약 국론통일' 이라는 휘호는 단돈 5백달러에 5년반 전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 나왔다. 취임 초 YS의 휘호는 개당 5백만원을 호가하기도 했다.

YS가 생각을 바꿔 이번 서도전 수익금 전액을 불우이웃 돕기에 쓰기로 했다고 한다. 원래는 거제에 YS 기록관을 세울 예정이었다.

'서도정치' 보다는 '이웃사랑' 이 훨씬 마음에 와닿는다. 그는 즐겨쓰는 '대도무문(大道無門)' 도 좋고, '송백장청(松柏長靑)' 도 좋지만 이 기회에 '논어' 첫장에 나오는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닌가)를 써보는 건 어떨지….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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