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2년 비록 북핵 2차 위기] 3. 북핵과 이라크 전쟁 함수관계는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2년 10월 17일(한국시간) 백악관에서 의회의 대 이라크 무력 사용 결의안에 서명하기에 앞서 연설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북한의 새 핵개발 시인 문제가 이날 언론에 누출된 것을 확인하자 부시 연설 수시간 후 북핵 문제를 전격 발표했다. [중앙포토]

2002년 10월 16일 중앙일보 편집국. 정치부 통일외교팀에는 종일 비상이 걸렸다.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3~5일 평양 방문 때 북한으로부터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받았으며, 이를 한국과 논의하기 위해 조만간 극비리에 다시 방한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담당 기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저인망 취재가 시작됐다. 켈리의 방한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됐다. 베이징을 거쳐 19일 서울에 온다는 것을 외교부.미 대사관으로부터 파악했다. 그러나 "뭘 협의하느냐"가 잡히지 않았다. 당국자들의 입은 자물통이었다.

외교부의 한 당국자로부터 "북.미 관계에 진전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들은 것이 유일한 소득이었다. 결국 다음날 기사는 2면 머리로 '평양 갔던 미 켈리 특사 2주 만에 재방한, 북 중대 제안 대응책 조율 관측'으로 나갔다. 17일 새벽. 외교부 당국자들은 본지 보도를 확인하려는 기자들의 전화에 시달린다. 그때까지도 당국자들은 진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난리가 난 것은 그 몇시간 후였다. 오전 9시30분쯤. 이태식 외교부 차관보는 "켈리 방북 때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핵 개발 계획(HEUP)을 시인했다"고 미국과 동시에 발표했다. 열흘 넘게 숨어 있던 2차 북핵 위기가 바깥으로 표출하던 순간이었다. 본지는 북핵 정보에 관한 당국의 보안 통제 벽을 넘지 못했다. 묘하게도 발표일이 17일로 잡히게 된 것은 미국에서의 정보 누출과 관련이 있었다.

◆"켈리 방북 결과 언론에 새나갔다"="당초 한.미.일 3국은 10월 27일 멕시코 로스카보스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예정된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HEUP 시인 문제를 다루고, 또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17일 새벽 미국이 외교채널을 통해 보안유지가 어렵게 됐다는 연락을 해왔어요. USA 투데이가 켈리 방북 결과를 거의 파악해 다음날 보도할 것이란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언론 보도 전에 부랴부랴 한.미 양국이 동시에 발표하게 됐던 겁니다."

당시 정부 관계자 A씨는 "언론이 낌새를 차리지 못했더라면 이 문제는 나중에 알려졌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일각에선 미국의 의도적 누출이라고 하지만 외교부 측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당시 미국의 상황이 그렇지 않았을 뿐더러, 고의적으로 흘려서 얻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왜 발표를 10월 말로 늦추려 했던 것일까. 미 국무부는 켈리 방문 결과에 대해 어떠한 정보 공개에도 반대했다고 한다. 켈리 귀국 열흘이 지나도록 미국 언론에서 관련 보도가 나오지 않은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이라크 변수가 깔려 있었다. 켈리 방북 후 미 행정부엔 이라크 관련 중요 국내외 일정이 겹쳐 있었다. 하나는 상하 양원에서의 이라크 무력사용 결의안 통과 문제였다. 10월 10일. 하원은 부시 대통령에게 군사력 사용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찬성 296대 반대 133으로 통과시킨다. 그 다음날 상원 표결에서는 찬성 77대 반대 23으로 결의안이 가결됐다. 이때는 부시 대통령이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토미 프랭크스 중부군사령관(대장)으로부터 이라크 전쟁계획의 세부 작전안을 보고받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공격 시나리오(Plan of Attack)', 밥 우드워드 저).

그리고 17일은 부시 대통령이 의회의 무력사용 결의안에 서명한 날이었다. 동시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라크 문제에 대한 공개적 논의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이라크 공격의 길을 다듬는 국내외 일정이 몰린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를 잠시라도 제쳐두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언론의 특종 보도를 사전에 파악한 부시 행정부는 무력 사용 결의안 서명 몇 시간 후에 켈리 방북 결과를 공표한다. 당시 공식 발표 몇 시간 전에야 이 사실을 안 미 민주당 의원들은 발끈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존 케리 상원의원은 당시 "전면적인 정보공개가 신뢰를 쌓는 데 중요하다"고 행정부를 쏘아붙였다. 외교소식통 B씨의 얘기. "2차 북핵 위기는 이때부터 일정 부분 미국의 대 이라크 정책과 맞물려 돌아간다고 봐야 합니다. 북한도 미국의 대 이라크 행동절차에 맞춰 줄타기를 하고, 미국도 이라크 상황에 따라 외교 일정 등을 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북한이 영변의 5MWe 원자로와 방사화학실험실(핵 재처리 시설) 가동 등을 통해 핵 위기지수를 한 단계씩 올려가도 부시 행정부가 아무런 금지선(Red Line)을 긋지 못한 것은 이라크 개전 및 이후의 불투명한 정세와 맞물려 있을 수도 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핵심 입안자인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과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이 1999년의 대북 정책보고서에서 "북한의 행동에 금지선을 설정해야 한다"고 한 제언은 빈말이 돼야 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94년 1차 핵위기 당시 북한이 핵 재처리를 위해 5MWe 원자로에서 사용후 핵연료봉을 빼내려고 했을 때 정밀 폭격을 검토했었다.

◆"북핵 문제 한국 배제 절대 안돼"=북한의 HEUP 시인 발표는 전 세계에 큰 파장을 던진다. 그러나 국내에선 북핵 문제 자체보다 이것이 두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더 큰 관심사로 보였다. 남북 정상회담, 남북 철도.도로 연결작업으로 남북 관계에 새 이정표를 세운 김대중 정부엔 악몽과 다름없었다. 과제는 북핵 문제를 어떻게 관리해 다음 정권에 넘겨주느냐, 남북관계를 어떤 수준에서 유지하느냐로 압축됐다. DJ정부는 켈리의 방북 브리핑 후부터 숨가쁘게 돌아갔다. 당시 결정 사항은 지금까지 핵 문제 해결의 틀로 남아 있다.

당시 고위 관계자 C씨의 얘기. "정부는 북한의 HEUP 추진이 북.미 제네바 합의 위반 이전에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어요. 기본적으로 우리가 나서야 할 문제지만 북한의 협상 전략 속성상 북.미 양자 문제로 끌고가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이의 조화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이 협의과정에서 핵 문제 해결의 3대 기조가 결정된다. ▶북핵 절대 불용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 병행이 그것이다. 이 기조는 북한에 대한 경고, 부시 행정부의 강경책에 대한 견제, 제네바 합의과정에 대한 반성을 함께 담고 있었다.

이 관계자의 이어지는 설명-. "'북핵 절대 불용'은 북한에 대한 메시지이자 국제사회에 대한 우리의 다짐이었습니다.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의 경우 '대화를 통한'이라는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평화적 해결'에는 제재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한반도 정세,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뻔했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통한'이라는 표현을 넣게 됐지요. 핵 문제-남북관계 병행은 93~94년의 1차 핵위기 해결과정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지 3개월 만에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대와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북관계는 봉쇄됐고, 이후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하에 북.미 협상이 진행됐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북.미협상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를 미국의 브리핑을 통해 파악해야 하는 신세가 됐지요. 그리고 경수로 비용은 70%나 부담했습니다. 그 반성 위에서 핵 문제 해결 과정에 우리도 참가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입장을 정리했을까. 리처드 바우처 대변인은 17일 성명에서 중요한 두 개의 메시지를 던진다.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평화적인 해결을 희망한다"와 "북한 주변의 모든 국가는 북한 핵무기 계획에 대한 이해관계가 있다"가 그것이다. 평화적 해결과 다자주의 접근을 내비친 것이다. 북핵 관련국과의 협의를 위한 미국의 움직임은 전광석화 그것이었다. 동시에 중국 중시 행보가 시작됐다. 18일 베이징. 존 볼튼 국무부 차관과 켈리 차관보는 먼저 중국 관계자들과 북한의 HEUP 문제를 협의했다. 미측 발표는 "회담은 건설적이었고, 유익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볼튼은 모스크바→런던→파리→브뤼셀, 켈리는 서울→도쿄의 일정에 들어간다. NPT상 핵 보유가 인정되는 4개국(중.러.영.프)과 유럽연합(EU), 동맹국이자 북핵 관련국인 한.일 양국으로 최초의 동선을 국한한 것이다. 거의 같은 시각. 평양에선 정세현 통일부 장관이 북한과 힘든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오영환 기자, 정용수 연구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