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간직한 사람은 황혼이 아름답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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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호 16면

김남조 선생을 뵈었다.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예장동에 있는 ‘문학의 집’에서였다. ‘미당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선생께서도 걸음을 하셨다. 참 오랜만이었다. 대학 시절 문학잡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자주 뵈었다. 졸업한 뒤에는 두어 번 문학 관련 행사에서 인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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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 지팡이를 짚고 로비를 들어서실 때 인사를 드렸다. ‘아는 얼굴인데, 누구더라?’ 싶은 표정이었다. 서운하지 않았다. 시간은 지우개다. 더구나 이 무례하고 게으른 자는 문단의 선생님들을 잘 모시지 못했다. 스승이신 홍윤숙 선생께도 세배 한번 안 드렸다.

김남조 선생께서는 말씀하실 기회를 얻자 앞으로 사업회가 걸어야 할 험난한 길을 예상하며 심란해하셨다. 당연한 일이다. 다른 시인도 아니고 미당을 기념하는 사업회가 아닌가. 가시밭길이 앞에 놓였음은 당연하다. 김 선생께서 말씀하실 때 함박눈이 쏟아졌다. 선생께서는 잠시 말씀을 멈추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셨다.

행사가 끝난 뒤 다시 인사를 하려 했다. 차례는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지방에서 온 여류 문인이며 시낭송가들이 선생을 에워싸고 사진 찍기에 바빴다. 선생께선 싫은 내색 없이 포즈를 취해 주셨다.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선생의 시 ‘겨울바다’를 뇌었다.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미지(未知)의 새/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후략)’
선생과 헤어진 다음, 병에 걸렸다. 겨울 바다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처럼, 파도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사이렌의 노래 같은 그 강렬한 유혹. 결국 3일 새벽 눈을 뜨자마자 속초로 달렸다. 관동대학교의 한창도(69사진) 교수를 인터뷰할 계획을 앞당겼다. 가불 인터뷰.

한창도교수는 1980~90년대 미국프로농구(NBA) 해설자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지역 초등학교에 농구를 보급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벌써 초등학교 팀을 두 개 만들었다. 마이클 조던을 굳이 ‘마이클 쫄단’으로 발음한 이 샤프한 해설자는 푸근한 할아버지가 되어 꿈나무들을 어루만졌다.

지혜와 온유. 그것은 사람을 향한 시간의 선물이다. 내면에 진실을 간직한 사람들은 시간의 조탁을 통해 완성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법이다. 왕년의 명감독 방열 전 경원대 교수도 은퇴한 뒤 저서를 쏟아내고 있다. 황혼이 아름다운 사람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다. 그들이 즐기는 시간의 선물을 나눠 갖고 싶다.

겨울바다 앞에 섰다. 바다는 짙은 쪽빛이었다. 다시 김남조 선생을 떠올렸다. 젊은 날의 선생은 날카로워서, 스치면 베일 듯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문학의 집에서 뵌 선생에게서 기품과 함께 어머니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본디 미인이지만,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문학의 집에서 여러 번 춥다고 하셨는데, 건강이 어떠신지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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