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뒷방 노인’서 ‘금융개혁 리더’로 변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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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호 28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지낸 폴 볼커(83·사진) 경제회생자문위원장은 지난해 11월 비서 앤크 데니그에게 청혼했다. 그 비서가 15~20살 연하라는 설이 파다하다. 한 달쯤 뒤인 12월 두 사람은 약혼식을 치렀다. 씨티그룹 이사인 팀 콜린스는 “또다시 그가 통념의 틀을 뛰어넘는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황혼 약혼식’여운이 가시지 않은 올해 1월 21일. 다시 볼커는 사람들, 특히 월가 플레이어들의 통념의 틀을 넘어섰다. 버락 오바마가 ‘볼커의 룰’이라 부르는 금융개혁안을 내놓았다. 상업은행의 헤지·사모 펀드 투자, 고유계정(자기자본) 트레이딩(Proprietary Trading) 등을 금지하자는 제안이었다. 이후 그는 모든 논쟁의 중심에 섰다. 화려한 부활이다.

그는 경제회생자문위원장이라는 명함을 들고 다녔지만 오바마의 경제정책 결정에 끼지는 못했다. 정책은 티머시 가이트너, 로런스 서머스 국가경제자문위원장, 피터 오스재그 백악관 예산국장의 몫이었다. 딱 1년 전인 2009년 1월 볼커는 금융개혁안을 제시했다. 오바마의 개혁안과 같은 내용이었다. 워싱턴이나 월가 어느 쪽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바마가 국정 경험 없는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동원한 ‘뒷방 노인’으로 취급했다.

그랬던 월가가 지금은 볼커 때문에 안달이다. ‘볼커 룰’의 입법을 막기 위해 미 의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고 있다. 볼커에 대한 비판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그가 1987년 이후 23년 동안 금융 현장과 떨어져 있어 현실 감각을 잃어 그런 개혁안을 내놓았다고 주장했다. 시대착오라는 얘기다. 한 술 더 떠 지난해 여름 볼커가 농담으로 한 말을 꺼내 현대 금융에 대한 그의 무식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내미는 인물도 있었다. 그때 볼커는 “현대 금융의 가장 유용한 혁신은 현금지급기”라고 웃으며 말했다.

볼커를 지지하는 쪽은 월가가 그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비판했다. 세계은행 총재를 지낸 제임스 울펀슨은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볼커는 모든 시장 참여자들이 안전하고 공평하게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며 “그런 시장을 만들기 위한 방안을 사심 없이 내놓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월가도 그가 사심 없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는 FRB 의장에서 물러난 뒤 ‘초연한 원로’의 길을 택했다. 월가 투자은행에서 거액 연봉과 보너스를 받지 않았다. 사생활도 검소했다. 1등석 비행기도 타지 않았다. 한 개비에 10센트밖에 되지 않는 싸구려 시가를 피웠다. 79년 8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그를 FRB 의장에 임명한 것도 사심 없는 그의 성격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통념과 맞서 승리해본 인물
그는 FRB 의장을 맡은 이후 당시 주류였던 케인스 이론과 결별했다. 그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물가 상승의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고금리 처방을 강제해 미국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인플레 기대심리를 털어냈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79년 상원 인준 과정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인준 투표에서 당시까지 가장 많은 반대표를 받은 FRB 의장이었다. 볼커가 의장을 맡으면 FRB가 백악관의 금고로 전락할 것이라는 평 때문이었다.

어렵게 의장에 취임한 후에도 볼커는 한동안 FRB 내부 반발에 시달려야 했다. FRB 멤버들 상당수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제거를 가장 중시하는 볼커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볼커는 공개시장정책위원회(FOMC)의 권한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전술까지 써가며 FRB를 장악해 들어갔다. 끝내 그의 철학대로 인플레이션 사냥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인플레 사냥의 기회비용은 더블딥(이중 침체)이었다. 전문가들은 80년대 두 번째 침체(81년 7월~82년 11월)를 ‘볼커 침체’ 또는 ‘인위적인 침체’라고 부른다. 첫 번째 침체(80년 1~6월)는 2차 오일쇼크 등으로 발생했지만, 두 번째 침체는 인플레 사냥을 위해 볼커가 의도적으로 통화량을 긴축해 일으켰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침체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벤저민 스트롱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1920~21년에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통화 증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통화정책의 핵심은 워싱턴의 FRB가 아니었다. 월가를 관할하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이었다.

87년 FRB 의장에서 물러난 볼커는 “위기감이 퍼져 있을 때 의장을 맡아 일하기 수월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인플레이션이 두 자릿수에 달해 미국인들이 극약처방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 자신이 새로운 논리를 적용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전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인 게리 코리건은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WSJ)과 인터뷰에서 “볼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요한 경제적 격변을 현장에서 겪었다”며 “그래서 통념에 안주하기보다 거부하는 인물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볼커는 브레턴우즈 체제가 무너진 현장에 있었다. 미국이 금태환을 포기한 71년 그는 재무부 국제금융 담당 차관이었다. 그는 미국의 재정·무역 적자가 커지자 해결책으로 당시엔 ‘하늘의 섭리’쯤으로 여겨졌던 달러-금 태환을 포기하는 방안을 제시해 관철시켰다. 달러 가치를 포기하는 대신 미 경제 자체를 살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금융규제 때문에 레이건과 결별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사냥해 돈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세력의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근본이 민주당 지지자다. 결국 충돌이 발생했다. 금융규제가 화근이었다. 레이건은 월가가 요구한 대로 상업과 투자은행의 분리(글래스-스티걸법)를 폐지하려고 했다. 볼커는 반대했다. 그는 금융시장은 적절히 규제돼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는 “금융시장을 이기주의가 판치는 곳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레이건이 규제 완화에 동의하지 않는 볼커를 87년 해임했다”며 “대신 투자은행 JP모건과 인연이 있는 앨런 그린스펀을 FRB 의장에 임명했다”고 말했다.

그린스펀은 볼커의 인플레 억제 정책과 기법을 그대로 승계하면서 적극적으로 규제를 풀었다. 87년 이후 10여 년 동안 금융규제 완화가 봇물을 이뤘다. 마침내 99년 금융산업현대화법이 제정되면서 글래스-스티걸법이 사라졌다. 그해 볼커는 월가에 “금융의 신사도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금융의 신사도는 금융인들이 자사 이익을 떠나 시장 전체를 걱정하는 관행·문화 등이다. 볼커는 “고삐 풀린 야생마가 결국 시스템을 위기로 몰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의 말대로 거품과 위기가 발생했다.

볼커는 위기를 이용해 인플레 사냥에 성공했듯이 이번 위기를 틈타 금융시장의 게임 룰을 복원하려고 한다. 그 복원이 지지자들이 말하는 사필귀정인지, 비판자들이 말하는 시대착오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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