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국론, 정확히 반쪽으로 갈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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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7일 치러진 제43대 미국 대선이 '플로리다발(發) 허리케인' 에 휘감겼을 때 지구촌 다른 나라들과 미국 내에선 낙관론이 더 많았다.

쿠바나 이라크, 그리고 중국을 포함해 평소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던 국가들의 노골적인 빈정거림이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 멋지게 수습할 것" 이란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다양함' 이라는 후한 평가도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상황은 이제 정말 '장난이 아닌' 쪽으로 가고 있다. 고어와 부시 민주.공화 양당 대통령 후보를 정점으로 미국 내 국론은 정확히 반으로 갈렸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고 비난의 도가 깊어가는 양상인 것이다.

미국 내 분열양상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게 21일 밤 내려진 플로리다 주 대법원 결정에 대한 공화당측 반응이다.

플로리다 대법원은 재검표 결과 집계에 팜비치 등 세곳의 수작업 재검표를 포함시키라고 했고, 이것은 물론 고어에게 유리했다.

부시측도 결국 이를 수용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부시측은 정면 도전했다. 부시는 "대법원 결정이 공정하지 못하다" 고 말했다.

미국 같은 사법우위 국가에서 정치인이 사법부 판단에 시비를 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부시측은 고어가 이길 경우 공화당이 장악한 플로리다 주 하원을 동원, 선거결과를 인정치 않고 자체적으로 선거인단을 뽑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

플로리다 하원 대변인인 공화당의 톰 피니는 "일단 추수감사절을 지낸 후 무엇을 할지 법적으로 검토하겠다" 고 말했다.

더 황당한 시나리오도 있다. 고어가 오는 12월 18일의 선거인단 선거에서 이기면 공화당이 지배하는 연방하원이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그것도 가능하다. 이쯤되면 미국은 그야말로 20세기 이후 최대 위기국면을 맞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양대 신문인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심각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전처럼 "공정하게 잘하라" 고 말하는 수준이 아니다.

두 신문은 23일자 사설을 통해 부시를 공격하고 나섰다. 물론 이들 신문은 대선정국에서 고어를 지지했다.

하지만 고어를 밀어주려고 사설을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차원을 넘어 미국의 정체성이 위기라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신문의 지적은 똑 같다. "플로리다주 대법원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면 앞으로 모든 게 다 뒤죽박죽 된다" 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국론이 갈린 때가 여러번 있었다. 남북전쟁이나 월남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위기의 시기가 아니다.

미국은 사상 최대의 경제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번 갈등은 공황이나 전쟁 때문이 아니라 단지 누가 대통령직을 차지하느냐를 놓고 시작됐다. 그래서 더 심각하다.

이번 대선파동을 계기로 미국은 여러 곳에서 구멍난 미국식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재검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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