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아셈서 스타일 구긴 고이즈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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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9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폐막한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적잖이 실망하는 기색이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면서 별다른 역할이나 성과가 없었다는 자책 때문이다.

일본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란 외교적 과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이번 회의에 임하는 각오도 상당했다. 경제규모에 어울리는 정치적 역할을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노력은 무산된 느낌이다. 그 이유는 중국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의 ASEM 참석기간을 예년보다 이틀가량 넉넉히 잡았다. 중국 정상과의 공식 회담을 현지에서 이뤄내기 위해서였다. 상임이사국인 중국의 찬성이 없으면 상임이사국 진출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회담을 거부했다. 결국 고이즈미 총리는 7일 회의장 대기실에서 원자바오(溫家寶)총리에게 다가가 잠시 환담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한마디로 스타일을 구긴 것이다.

반면 중국은 회의 기간 내내 주역이었다. 핀란드.스웨덴.영국 등 유럽 7개국의 수뇌부와 연쇄 회동을 하는가 하면 중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겐 수십억달러의 선물 보따리를 안겼다. 프랑스의 중장비 기계제작 회사인 알스톰사에 중국의 철도와 수력발전소 사업을 맡기는 등 20건이 넘는 경제 관련 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유럽국가 상당수가 이번 회의에서 중국 입장을 옹호하고 나선 데도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시라크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계속되고 있는 유럽연합(EU)의 대 중국 무기금수 제재 조치를 빨리 풀어야 한다는 게 대세다. 그러니 일본도 협력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에는 상임이사국 진출이 멀고도 먼 길이란 것을 새삼 느끼게 한 회의였을지 모른다.

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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