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노동시장 유연화 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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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기업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고 경기침체가 시작됨에 따라 실업자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대학졸업자들이 노동시장에 나오는 시기와 겹쳐져 실업률은 다시 4%를 넘고, 내년 초에는 실업자 수가 1백만명을 넘을 전망이다. 고용시장이 이처럼 불안해지면서 노동운동도 최근에 다시 격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사실 근로자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1998년과 99년 2년간 임금이 동결되거나 삭감되는 고통을 겪고 나서 올해에 겨우 97년의 임금수준을 회복하나 했더니 경제가 다시 곤두박질하게 되니, 결과적으로 거의 5년간 소득향상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달러 표시의 국민소득은 아직 95년의 수준도 회복하고 있지 못하다. 소득은 정체 내지 감소하고 고용은 더욱 불안해졌으니 근로자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고 느낄 만하다.

그러나 만약 지금 다시 노동운동이 과격화하고 불법적인 파업이 늘어난다면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경기침체는 장기화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높은 소득을 원한다.

하루빨리 우리의 일인당 소득이 2만달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국민소득이 지금의 두 배가 되려면 우리의 생산성이 두 배로 뛰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하는 일이 부가가치를 많이 창출해야 한다. 비숙련근로자는 숙련근로자가 돼야 하고, 숙련근로자와 관리직.연구직.판매직 종사자들도 일의 강도와 효율을 더욱 높여야 한다.

그러나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근로자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일터에서 설비투자와 시스템개선 등의 투자가 수반돼야 한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소득이 높아지려면 급여가 높은 직종이 늘어나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런 직업을 제공해줄 기업과 투자가 늘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외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려면 노동시장이 유연화하고 산업평화가 정착돼야 한다. 기업은 국내기업이나 외국기업이나 모두 입지선택의 자유가 많은 반면 근로자들은 가서 살 곳을 그렇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만약 한국의 노동시장이 경직돼 있어 근로자들이 생산성에 맞지 않는 높은 급여를 받게 된다면 조만간 그 기업은 문을 닫거나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IMF위기 이후에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다소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한국은행의 자료에 의하면 위기 이후 임시직 및 시간제 근로자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노동생산성도 향상됐고 단위당 노동비용은 낮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기업이 사업 구조조정을 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고, 구조조정의 와중에 있는 기업들이 높은 급여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가 하면, 정부소유기업을 포함해 주인 없는 조직에서는 생산성과 관계없이 급여와 제반 복지비를 과도하게 지출하는 일이 아직도 성행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세계화와 정보통신기술이라는 두 개의 큰 추세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런데 국민경제가 이 두 추세로부터 혜택을 보려면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선결조건이다. 국제자본은 노동시장이 경직돼 있고 산업평화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는 피해 다닌다.

또한 정보기술이 가져오는 신경제의 효과도 노동시장이 유연해야 나타나게 된다. 90년대 초에 IBM은 전세계적으로 44만명에 달하던 사원 수를 절반 이상 줄이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런데 요즈음 미국의 정보산업을 주도하는 경영자 중에는 그 때 IBM을 떠난 사람이 상당수라고 한다.

이제 노동운동도 시장친화적인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조합원의 숙련도와 지식수준을 높이고, 해고와 신규채용이 원활이 이뤄지도록 협조하며, 무엇보다 이념투쟁의 노선을 버리고 조합원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노동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의 소득은 지금 수준에서 정체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구현 <연세대 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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