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미술관' 개관기념 이응노 추모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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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객처럼 살며 작품활동을 하다 현지에서 숨진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1904~1989). 동양화가로 시작해 문자추상이라는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으나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출국, 끝내 돌아오지 못했던 풍운아. 그의 삶과 예술을 추모하는 '고암 미술관' 이 14일 서울 평창동에서 문을 연다.

미망인 박인경(75)씨가 3년여에 걸쳐 대지 1백50평에 3층짜리 미술관을 짓고 관장을 맡았다.

개관기념전으로 14일~12월 29일 '40년만에 다시 보는 이응노 도불(渡佛)전' 을 한다. 고암이 58년 동양화가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서울에서 열었던 기념전의 작품 61점을 1.2부로 나눠 번갈아 전시한다.

선묘가 분방한 반추상작품 '해저' , 특유의 자유분방한 붓놀림으로 화면 전체를 엷은 색조의 점으로 꾸민 '생맥' 등은 그 파격성으로 당시 화단에 놀라움을 던졌었다.

42년 전의 작품이 모두 그대로 남아있는데 대해 미망인 박인경씨는 "고암은 '군인에게 총이 있어야 하듯 화가는 어디를 가든 작품이 있어야 한다' 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면서 "파리에서 작품세계가 바뀌면서도 이 작품들을 애지중지 여겨 하나도 처분하지 않고 지녀왔다" 고 소개했다.

충남 홍성 출신인 고암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문하에서 문인화를 공부한 뒤 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 으로 입선해 미술계에 등단했다.

전통산수에 매달려 있는 국내 화단에서 탈출하기 위해 58년 파리로 건너가 이듬해 독일에서 순회전을 가진 다음 60년 파리에 정착했다.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한 파케티 화랑과 전속계약을 해 61년 파리 데뷔전을 가졌다. 이후 파리의 동양미술관인 에르누시 미술관 내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워 유럽인들을 가르치면서 서예의 조형요소를 현대화한 문자추상을 탐구했다.

현지의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가장 성공적인 동양화가' 의 영예를 누렸다. 그러다 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귀국,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도 밥풀과 휴지 등을 이용해 수많은 작품을 만드는 창작열을 과시했다. 고암은 70년 프랑스로 돌아가 귀화한 뒤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89년 꿈에 그리던 고국 초대전(호암갤러리)을 앞두고 급서, 예술의 대가들이 묻힌 파리 시립 펠 라세즈 묘지에 안장됐다.

미술관은 고암 작품의 전시 뿐 아니라 학술.출판 등의 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파리 근교에 보쉬르 센에 자리잡은 기념관 '고암서방(顧菴書房)' 과 더불어 고암의 예술세계를 알리는 본산역을 수행하는 것이다.

미술관은 앞으로 고암서방에 보관돼 있는 4천여점의 작품으로 연간 4회의 기획전을 꾸밀 계획이다. 한국화는 물론 타피스트리, 디자인, 삽화, 서예 등 그가 섭렵한 모든 작품이 포함된다.

박관장은 "고암의 작품을 한국에 영구 귀국시키는 것은 작고작가의 작품반출을 규제하는 프랑스 정부와 법적 절차를 마무리 지은 뒤가 될 것" 이라고 밝혔다. 02-3217~5672.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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