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지브랏의 법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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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브랏은 일찍이 미국 기업의 흥망사를 분석하며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70년 이상에 걸친 수천개의 기업자료에 의하면, 내일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가 하는 기업의 운명은 오늘의 기업규모와는 관계없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잘 나가는 대기업과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이 직면하는 생존의 확률은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지브랏의 법칙이다.

*** 기업 운명은 규모와 무관

얼마 전까지도 이 법칙은 한국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쓰러져가는 대마(大馬)를 붙들기 위해 정부가 나서고, 멀쩡한 계열기업이 담보가 되었으며, 금융기관이 볼모가 돼 왔다.

예외없는 법칙이 없다고 하지만, 이제는 불행히도(?) 이 예외에서 벗어나게 됐다.

30대 재벌이 지금 몇 개나 변변히 살아남았는가? 현대건설이 이렇게 쉽게 벼랑에 떨어지는 것을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런 현상은 고도성장에 친숙했던 우리에게만 생소했을 뿐, 이미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된 사실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1백대 기업에 신규로 진입한 기업이 2백13개나 되었고, 수명은 평균 4.8년에 불과했다.

경제의 글로벌화로 불확실성이 증대되었고, 기업의 수명은 짧아지고 있으며, 내일의 운명은 더욱 점치기 어렵게 됐다.

대기업이 사라져야 우리 경제가 활력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쾌재를 부르겠지만, 이것은 기업규모와 상관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추세라서, 경제기반이 모두 무너질 수도 있는 잠재적 위협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 우리 경제도 위기를 맞고 있다.

한때 한국을 대표한다던 현대건설이 벼랑 끝에 서 있고, 세계경영의 상징이라던 대우그룹의 유산이 우리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중소기업에 미치는 여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이 부담해야 할 공적자금의 규모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위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와 변화 속에서 우리 경제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선 기업의 흥망성쇠가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경제주체가 이런 변화를 수용할 수 있을 때, 경제의 생존력은 오히려 더 강화된다.

따라서 일정기간에 구조조정을 완료하겠다거나, 쓰러져가는 대기업을 고용불안에 대한 우려나 정치적 고려로 연명시키려는 발상도 버려야 한다.

구조조정은 일상적.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며, 어려워지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퇴출되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는데 더 이상 학습비용을 지불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업이 시장환경에 신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다. 고용의 유연성은 물론이고, 신규 투자와 퇴출에 이르기까지 신속히 적응할 수 있는 부드러운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수익성과 무관하게 기존사업을 유지하는 경직적인 전략이나, 구조조정을 거부하는 강경한 노사대립은 결국 퇴출을 앞당길 뿐이다.

역설적으로 근로자가 원하는 고용의 창출은 신속한 구조조정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시장이 어려워질수록 신속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지만, 실업은 피할 수도 있는 결과다.

*** 시장 거스르면 생존 못해

시장에 역행하는 기업 행태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기업은 시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다.

그 시장에서 버림받고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단 말인가. 대우가 붕괴되고, 현대가 벼랑에 선 것도 결국은 시장의 신뢰를 저버렸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시장의 영향력은 당연히 증대된다.

정부의 정책도, 기업의 전략도, 노조의 투쟁도 모두 시장이 지켜보고 있다. 오늘 시장을 거스르는 선택은 내일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경제의 위기는 항상 기회와 함께 온다. 수십년 동안 성장한 우리 경제가 몇년 침체되는 것은 결코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문제는 침체가 아니라 얼마나 더 많은 학습비용을 지불해야 생존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느냐이다.

정갑영 <연세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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