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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고 연민 이가원 선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밥 대신 죽을 드시고 쌀 살 돈으로 책을 사 읽으셨지. " (연세대 이윤석(李胤錫) 교수)

"파이프를 물고 강의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말이죠. " (창원대 민긍기(閔肯基) 교수)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학을 익히신 분이지. 한시에 멋드러지게 구결(口訣.리듬)을 넣어 읽는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게 됐어. " (李교수)

지난 9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한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선생의 빈소가 차려진 고대안암병원 영안실. 유림에서 마련한 만장(輓章.애도시)이 빈소에 가득 걸려 있는 가운데 연세대 두 제자가 아련한 기억을 나누고 있었다.

퇴계 이황(李滉)의 14대 종손인 선생은 전통적 서당교육을 받아 이를 근대 학문에 접목시켜 당대 최고의 한학자로 꼽히던 인물이다.

한학과 관련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특히 '연암소설연구' 와 '조선문학사' 는 역저로 꼽힌다.

연암소설연구는 실학자 박지원의 문학세계를 가장 폭넓게 조명해 이 분야의 교과서로 꼽히며, 조선문학사는 한문학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문학사를 총정리한 방대한 저술이다.

현존하는 중견학자 치고 이 분야에서 선생으로부터 사사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정범진(丁範鎭) 전 성균관대 총장.전인초(全寅初) 연세대 교수 등이 선생의 애제자들이다.

1917년 추노지향(芻魯之鄕.공자, 맹자의 고향)으로 불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서당교육을 받은 뒤 명륜학교(성균관대 전신)에 입학했다.

선생은 이미 20대에 위당 정인보(鄭寅普).육당 최남선(崔南善).벽초 홍명희(洪命熹) 등과 교유하며 청년 문장가로 이름을 알렸다.

55년부터 3년간 성균관대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58년 파면을 당한다.

유림 종장이던 심산 김창숙(金昌淑)선생이 독재의 길을 걷고 있던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을 당시 이를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야인생활을 하던 선생을 '모셔간' 곳은 선생이 20여년간 재직했던 연세대.

당시 부총장이던 외솔 최현배(崔鉉培)선생이 그의 저서 '교주 춘향전' 을 읽은 뒤 재능에 감탄해 백낙준(白樂濬)총장에게 적극 추천했고 白총장도 이를 기꺼이 수락해 그를 영입했다.

연세대 교수 시절 그의 학문은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

'연암소설 연구' 등의 작품이 이때 탄생한 것이다. 83년 연세대에서 정년을 마친 뒤에는 단국대 석좌교수.학술원회원 등을 지냈다.

선생은 이미 15년 전에 충북 중원에 묘자리를 봐두고 비문까지 새겨놓은 채 학문연구에 매진했다. 그만큼 학문에 대한 선생의 사랑은 이념을 비롯해 다른 어떤 것보다 한차원 위였다.

95년엔 고령의 나이에 조선문학사 집필에 들어갔다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은 "조선문학사를 끝내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며 삶에 강한 의지를 보이면서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조선문학사를 완성했다.

선생은 그제서야 제자들에게 "이제 여한이 없다" 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4월 '열하일기 필사본' 을 비롯,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인장 등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골동품과 서화를 마지막으로 재직했던 단국대에 기증했다.

단국대에서는 답례로 연민기념관을 기공했으나 선생은 자신의 기념관이 준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발인은 13일 오전 8시 929-0099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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