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 산책] 시향과 고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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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행길에서 재실(齋室)에 오르는 한마장은 사위가 온통 농익은 가을뿐이다.

매년 이맘때 지내는 시향(時享)이건만 올따라 유난히 재실을 품고 있는 불암산자락 봉우리가 맑푸른 하늘을 더이상 떠받치기 힘겨운듯 금새라도 쏟아져내릴 기세로 다가온다.

철모르는 손자들에게 '뿌리 공부' 시키신다고 백발을 날리며 꾸부정 걸음으로 앞서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도 영 예전만 같지 않으신게 맘이 편치않다.

나를 보시고, 나도 자식을 두었음에 팔십성상을 보내오신 저 분에게 무슨 윤기가 남아있으실까마는 맨날 '아버지' 로만 알았다가 낙엽을 보고서야 얼결에 '늙으신 아버지' 를 깨닫는 이 아둔한 치기에 절로 목이 메여온다.

행로가 짧은 탓에 언짢은 맘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왁자한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재실 마당에 와있다. 백여분은 됨직한 문중이 벌써 진설을 마친 채 본격 제향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서둘러 아들놈에게도 건을 씌워 백포(白袍)차림의 헌관.집사들과 함께 한문으로 된 홀기(笏記 : 식순.동시통역)낭독에 따라 부복도 하고 절도 하는데, 메가 뭔지 숙랭이 뭔지도 모르면서도 제법 엄숙한 몸짓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집을 떠나올 때 그저 "삼백년도 더 된 조상님들로부터 백년전 분들까지 뵙게될 것" 이라며 사대봉사(四代奉祀)의 제례법과 시향의 의미를 일러줬을 뿐이다.

제 깜냥에도 고풍스런 제례풍경에서 막연하나마 '뿌리의 깊이' 가 느껴지는 걸게다. 아버지께서도 신통해 하시는 표정이시다.

자식을 앞세워 자식의 도리(?)를 조금은 하는 것같아 아까의 마음이 한결 눅는다. 이래서 시월을 '상달' 이라고 하나보다.

본디 시향이란 것도 한햇동안 보살펴준 조상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햇곡 천신(薦新)을 통한 선후화합의 의례가 아니던가.

이 때문에 교통수단이 변변치 못했던 예전에도 천리, 만리를 불문하고 타관살이를 이날만은 접어두고 아들에게 도포 괴나리를 지워 금의환향이라도 하듯 고향을 찾곤했던 것이리라.

상달에 치러지는 나눔을 통한 신인(神人)화합의례의 또 하나는 고사(告祀). 손없는 날을 잡아 햇곡으로 시루떡을 해 성주신이며 조왕신, 용왕신, 곳간신, 마당신에다 심지어 측간신에게까지 그동안의 고마움과 함께 장래에도 끊임없는 보살핌을 비는 간구(懇求)의 연례행사다.

있는 집에선 무당을 불러 안택굿이다, 성주풀이다 해서 판을 키우기도 했지만 대개는 집안의 안어른이 주관했다.

평생 일만 하셔서 손바닥이 소나무 껍질 같으신던 할머니께서 아흔이 다되도록 매년 이맘때 쯤이면 아드님부터 증손까지 60여명의 자손이름을 일일이 불러올리며 신에게마다 "제발 살펴달라" 는 애절한 기도와 함께 서걱서걱 빌어대시던 모습이 지금도 내가슴에 종교로 생생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일월성신 하지후토 제천제불 팔금강님께 비나이다. 우리손주 만훈이 몸성하고 돈잘벌고… 하는 일 맘품은 일 아무쪼록 무탈하게 이 한시루 적다마시고 보살피고 도와주소서 - ."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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