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공사관이 폐쇄된 바로 다음 날인 1906년 2월 1일 문을 연 통감부 청사. 12개 주요 도시에는 지방관청을 감독하는 이사청(理事廳)이 세워져 식민지화의 기틀을 다졌다. 명동 쪽 남산 자락에 자리 잡았던 옛 통감부 터에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섰다.
그러나 다음 달 20일 발포된 일본 칙령 제267호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는 그때 대한제국이 외교권만 앗긴 것이 아니었음을 잘 말해준다. 천황에 직속되어 그 권한을 대행하는 막강한 지위를 누린 통감은 ‘필요’에 따라 한국 내정에 관한 사항도 한국 정부나 지방관헌에게 그 집행을 지시할 수 있었으며,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주차군 사령관에게 무력 사용도 명할 수 있었다. 총무부(비서과·서무과·외사과·내사과·법제과·회계과·토목 및 철도과), 농상공부(상공과·농무과·광무과·수산과·산림과), 경무부(고등경찰과·경무과·보안과·위생과)로 편제된 통감부의 기구는 한국 정부를 능가하는 규모였고, 지방 주요 도시에 설치된 이사청도 경찰 지휘권과 군대 동원권을 쥐고 지방 행정을 쥐락펴락하였다.
입법·사법·행정·군사 지휘권 등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쥐고 대한제국 황제 위에 군림한 실질적 제왕 이토 통감은 3월 2일 서울에 왔다. 9일 이토는 황제 알현 시에 자신이 통감이 된 이유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국의 쇠운(衰運)을 만회하여 독립 부강한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서”라고 아뢰었다. 그때 이토는 즉각적 식민지화를 주장한 군부에 맞서 표면적으로는 ‘자치육성정책’, 즉 ‘문화정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당분간 일본의 보호 아래 독립의 역량을 기르라는 입에 발린 정책 구호와 달리 이토가 펼친 유화책의 내용과 결과는 식민지 무단통치의 토대를 다지는 쪽으로 기능하였다.
이토는 조리법을 달리했을 뿐 애당초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을 살릴 마음이 없었다. 통감부도 일제가 이 땅을 지배하기 위해 세운 통치기구였지 우리의 독립과 부강을 도우려 만든 시혜용 기구가 아니었다. 그 역시 독립 옹호자의 가면을 쓴 수탈자였다. 그렇기에 이토의 가슴을 쏜 안중근의 의거가 식민지화를 재촉했다는 주장은 관중규표(管中窺豹)의 우(愚)를 범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