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때 오늘

대한제국 황제 위에 군림한 통감부 설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일본 공사관이 폐쇄된 바로 다음 날인 1906년 2월 1일 문을 연 통감부 청사. 12개 주요 도시에는 지방관청을 감독하는 이사청(理事廳)이 세워져 식민지화의 기틀을 다졌다. 명동 쪽 남산 자락에 자리 잡았던 옛 통감부 터에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섰다.

고종실록은 1906년 2월 1일의 역사를 이렇게 전한다.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제3조에 의거해 일본이 경성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후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작년 12월 21일 통감으로 임용되었지만 아직 부임하지 않아, 이날 임시 통감 대리 육군 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통감부 개청식을 진행하였다.” 한 해 전 11월 17일 일본군의 위협 아래 맺어진 을사늑약 제3조는 통감부의 설치와 통감이 외교권을 장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 아래에 한 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만을 관리하기 위해 서울에 주재하며, 친히 한국 황제 폐하를 내알(內謁)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다음 달 20일 발포된 일본 칙령 제267호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는 그때 대한제국이 외교권만 앗긴 것이 아니었음을 잘 말해준다. 천황에 직속되어 그 권한을 대행하는 막강한 지위를 누린 통감은 ‘필요’에 따라 한국 내정에 관한 사항도 한국 정부나 지방관헌에게 그 집행을 지시할 수 있었으며,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주차군 사령관에게 무력 사용도 명할 수 있었다. 총무부(비서과·서무과·외사과·내사과·법제과·회계과·토목 및 철도과), 농상공부(상공과·농무과·광무과·수산과·산림과), 경무부(고등경찰과·경무과·보안과·위생과)로 편제된 통감부의 기구는 한국 정부를 능가하는 규모였고, 지방 주요 도시에 설치된 이사청도 경찰 지휘권과 군대 동원권을 쥐고 지방 행정을 쥐락펴락하였다.

입법·사법·행정·군사 지휘권 등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쥐고 대한제국 황제 위에 군림한 실질적 제왕 이토 통감은 3월 2일 서울에 왔다. 9일 이토는 황제 알현 시에 자신이 통감이 된 이유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국의 쇠운(衰運)을 만회하여 독립 부강한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서”라고 아뢰었다. 그때 이토는 즉각적 식민지화를 주장한 군부에 맞서 표면적으로는 ‘자치육성정책’, 즉 ‘문화정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당분간 일본의 보호 아래 독립의 역량을 기르라는 입에 발린 정책 구호와 달리 이토가 펼친 유화책의 내용과 결과는 식민지 무단통치의 토대를 다지는 쪽으로 기능하였다.

이토는 조리법을 달리했을 뿐 애당초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을 살릴 마음이 없었다. 통감부도 일제가 이 땅을 지배하기 위해 세운 통치기구였지 우리의 독립과 부강을 도우려 만든 시혜용 기구가 아니었다. 그 역시 독립 옹호자의 가면을 쓴 수탈자였다. 그렇기에 이토의 가슴을 쏜 안중근의 의거가 식민지화를 재촉했다는 주장은 관중규표(管中窺豹)의 우(愚)를 범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