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기술 독립을 위해‘레지스탕스’를 키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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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04면

1970년 4월 초 완공을 앞둔 삼성전자 수원공장. 이 공장은 그해 5월 준공됐다. [삼성50년사]

이병철 회장의 선견력과 기업가 정신을 얘기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메뉴는 전자사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 결정이다. 그러나 그의 선견력과 기업가 정신이 투영된 구체적인 전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전략을 실현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요 조직이다. 그는 1968년 가전사업을 처음 구상할 때부터 ‘일본으로부터의 기술 독립’이라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치밀하게 조직을 설계했다. 삼성이 세계적인 전자그룹으로 성장한 데에는 이 회장의 남다른 태교가 있었던 것이다.

‘글로벌 삼성’ 터 닦은 고 이병철 회장

우선 그는 처음부터 소재·부품에서부터 완제품에 이르는 수직 계열화 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삼성코닝(브라운관용 유리)-삼성SDI(브라운관)-삼성전기(DY·FBT·튜너)-삼성전자(TV 세트)라는 4사 체제다. 소니보다 11년, 금성사(지금의 LG전자)보다 7년 늦게 흑백TV를 생산했던 삼성전자가 경쟁사들을 단기간에 추월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소재·부품의 자급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 회장은 부품 생산 조직을 완제품 회사 내의 부서로 설치하지 않고 별도 회사로 독립시켰다. 이는 선진 기업들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결단이다. 이 때문에 삼성의 전자계열 4개사는 치열한 경쟁과 상호 학습을 통해 각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만약 부품 3개사가 삼성전자 내의 제조부서로 존재했더라면 ‘시장과 고객’이라는 단어조차 잊고 살았을지 모른다.

셋째, 후발자의 약점을 극복하려고 처음부터 생산 규모를 극대화했다. 삼성전자의 수원공장은 45만 평에 이른다. “일본 도쿄에 있는 산요전기 공장(40만 평)보다 한 평이라도 더 커야 한다”는 이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 공장의 TV 생산 규모는 경쟁사의 10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였고, 삼성SDI 부산공장은 75만 평으로 역시 당시에는 국내 최대였다.

넷째, 도입한 기술을 하루라도 빨리 습득하기 위해 해외연수단을 조직하였다. 당시 전자분야 인력이 전무했던 삼성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에서 여성기능공까지 선발하여 기술 도입선인 산요전기와 NEC에 각각 6개월간 파견했다. 연수생 전원은 매일 야근을 자청하였고 숙소에 돌아와서도 팀별로 한 방에 모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날의 연수 내용을 공유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삼성은 암묵지를 체득할 수 있었다. 연수생들은 귀국 후 사내 교육을 주도하는 등 핵심 인력으로 활약하였다.

다섯째, 이 회장은 기술 독립을 위한 비밀병기를 설치하였다. 기술과 자본이 부족했던 삼성은 일본의 산요전기와 NEC, 미국의 코닝 등과 합작했고 부품과 완제품을 아우르는 여러 공장을 동시에 건설했다. 따라서 합작 사업과 공장 건설을 총괄할 조직이 필요했고 여기서 등장한 것이 삼성전자라는 지주회사다. 사업이라야 전자제품을 위탁 판매하는 수준이었고 처음 인원도 20여 명에 불과했으나, 이 회장은 장차 이 회사에 가전은 물론 반도체.컴퓨터.통신 사업까지 맡긴다는 구상이었다.

기술 도입과 공장 건설을 총괄하는 만큼 선진 기업의 경영 노하우와 기술정보를 입수하는 데 적격이라는 판단이었다. 합작 파트너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남몰래 기술 독립을 위한 레지스탕스를 키웠던 것이다. 자신이 설계한 조직을 통해 원대한 꿈을 실현한 이병철 회장. 하늘나라에서 그는 지금의 한국 경제, 한국 기업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윤종언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를 지냈으며, 일본 나고야대에서 삼성 TV 사업의 기술축적 과정으로 경영학 박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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