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강제동원 규명은 ‘국격’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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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일 관계의 과거와 현재는 비단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과 대만, 옛 소련과 동남아시아 등 일본의 침략전쟁 관련국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노력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향방과도 연관이 있다. 그런 면에서 노무자 공탁금 문서의 공개는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으로 불릴 만하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뒤에 숨은 채 기업에 책임을 전가해 왔는데, 이번에 공탁금 문서를 제공키로 함으로써 비로소 정부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무총리실 산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최근 입수해 공개한 ‘공탁금 일람표’에 있는 공탁금 채무내역에 포함된 ‘원호금’이 ‘일본 정부의 책임’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원호’란 일본 정부가 노무자를 공적으로 동원하고, 그 책임을 법적으로 규정한 제도다. 최근 ‘99엔 문제’로 화제가 되었던 ‘후생연금 탈퇴수당’이나 기타 여러 수급 항목도 공탁금 채무내역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일본이 최선을 다했다고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외침, 사할린 지역 강제동원과 원폭 피해자 문제, 한반도 내 강제동원, 시베리아 포로 등에 대한 조사 작업이 요구되며, 노무자 공탁금 문서 외에 후생연금명부나 우편저금 자료 등 1965년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재논의 역시 필요하다.

노무자 공탁금 문서는 3월에나 한국 정부에 전달된다고 한다. 20만 명이 넘는 인원이 등재된 자료를 분석하고 전산화하는 작업에만 몇 달,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우리 정부는 전문가들을 투입해 최대한 기간을 단축해야 한다. 10만여 명에 이르는 80세 이상 피해자와 유족들이 진실 규명과 지원금 수령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공탁을 하지 않은 일본 기업 자료와 한반도에서 노무자를 동원하고 지급하지 않은 미수금의 존재도 확인해야 한다. 공탁 내역 중 ‘조위금’과 ‘위로금’이라는 항목의 주인공(사망자)의 신원 및 유족 확인, 유골의 추적과 봉환, 위령사업도 정부가 할 일이다.

지난 4년여 동안 강제동원규명위원회와 일본 정부가 일본 전역에서 개인별로 화장된 유골 2600여 구와 합골된 유골 수천여 구의 실태를 확인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당시 일본제국 판도에 속해 있던 만주와 사할린, 남양군도의 유골 조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강제동원규명위원회가 사할린에서 한국인 묘지를 조사했다고 하지만, 500여 위에 불과했다. 나아가 시민교육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역사관·연구센터는 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공간이 아니다.

우리 정부 차원의 강제동원 피해 규명 및 희생자 지원사업은 국가의 성숙도와 품격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피해 당사국이 가해국과의 화해를 이끈다는 사실이 얼마나 성숙된 모습인가. 여기에서 진정 성숙한 ‘국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