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서는 북·미] 해외 전문가 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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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던 오랜 갈등구조의 딱딱한 껍질이 한꺼풀씩 벗겨지고 있다. 속도도 예상보다 빠르거니와 결과 또한 상당히 양호하다고 말할 수 있다. 순서를 제대로 잡은 덕분이다.

남북한의 관계개선없이 북.미간 개선도 없는 것이다.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趙明祿)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과의 회담에서 '북.미 공동성명' 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남북관계의 성공에 기인한다.

지난 6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이어지는 남북교류의 결실이 좋았기에 북.미간 관계개선이라는 작품이 나왔다.

과거 북한이 한국을 제쳐두고 미국과의 관계 회복만을 노렸던 잘못된 순서가 바로잡히기가 무섭게 한반도에 따뜻한 긴장완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이번 북.미 공동성명은 북한과 미국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윈-윈 게임이다. 북한은 정치적으로 테러지원국이란 오명에서 벗어나 국가 이미지를 크게 개선한 것은 물론 이를 계기로 국제사회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기가 무척 용이해졌다.

미국은 골치를 앓던 동북아에서 무거운 짐 하나를 덜게 됐으니 마음이 매우 홀가분할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북한의 시장은 그리 가볍게만 볼 곳이 아니다.

한국과의 회기적 교류 성사에 이어 미국과도 통크게 관계를 개선한 북한의 다음 행보는 일본이 될 것이다. 북.일 관계 정상화도 이젠 눈 앞에 한 발 더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가 과거 불안.초조에서 벗어나 이제는 화해를 주선율로 삼아 변하고 있다.

즉 정상국가간 관계로 전환 중인 것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 이처럼 환영을 받는 것을 보면서 이제까지 동북아 정세가 얼마나 긴장된 상태였는가를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특히 이번 북.미 공동성명에서 발표된 정전협정을 평화보장체제로 전환하자는 내용은 정상국가간 관계를 조약 차원에서 공고히 하자는 노력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를 계기로 남북한과 중국.미국이 참가하는 4자회담의 보폭도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사실 4자회담이 겉도는 것은 북.미간 갈등 탓이다.

북.미 관계가 개선된다는 것은 4자회담의 공전을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동북아에 평화적인 다자안전 메커니즘을 건설할 시점이 무르익었다는 징조이기도 하다. 북.미간 관계개선을 중국의 입장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중.미간엔 대만 외에도 북한이 언제나 중.미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갈등 요인이 돼왔기 때문이다. 북.미가 손잡고 한반도 긴장완화를 촉진시킨다면 중.미간 갈등 요인도 하나 줄어드는 셈이다. 중국 입장에선 환영할 일이다.

또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북한 방문 추진은 중국에도 커다란 자극제가 될 것이다. 고위층간의 교류는 친선을 증진시키는 촉매제다.

서부대개발 등 현대화 건설에 여념이 없는 중국은 앞으로 적어도 30년 가량의 평화상태가 절실한 입장이다.

북한이 한국.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며 세계 무대로 나서는 것은 개방 사회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만큼 전쟁의 위험성도 줄어드는 것이다. 중국은 때문에 북한이 서방 각국들과도 관계를 대폭 개선하길 바라고 있다. 북한이 세계로 나아가는 폭에 비례해 한반도의 긴장완화, 평화체제 구축이 공고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천평쥔 <중국 베이징대 교수>

정리=유상철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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