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앞에선 유치해도 좋습니다.왜? 가족이니까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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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호 02면

1 아들을 ‘비행기’ 태우고 있는최인호 작가. 1976년 그의 집 풍경이다. 딸은 다섯 살, 아들은 세 살 때였다. 사진작가 주명덕씨가 찍었다.

최인호 연작소설 ‘가족’
최인호(65) 작가는 1975년 월간 ‘샘터’ 9월호부터 ‘가족’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스물아홉 팔팔한 청년이 손녀의 재롱에 녹아나는 할아버지가 되기까지, 어찌 보면 평범한 ‘한 인생’이 35년 동안 이어진 것이다. 작가는 ‘가족’에 대해 “단순히 내 가족의 개인사가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가족사이기 바란다”는 소망을 밝힌 바 있다. 그의 의도대로 독자들은 그의 가족 이야기에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었다. 연재 중단 사실이 알려지자 잡지사로 편지ㆍ문자를 보내고 종이 학을 접어 보내며 아쉬워하는 독자들. 그들은 ‘가족’의 어디에서 자신을 읽어낸 것일까.

유치해, 유치해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사람의 인격도 발가벗겨진다. 떡진 머리를 하고 방귀를 뿡뿡 뀌어도 되는 ‘내 집’에서, 인격도 가장 밑바닥까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유치하다는 것이다. 각자의 그 꼴을 다 봐 내는 가족 이야기는 그래서 유치하다. ‘가족’의 첫딸 다혜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드디어 학부모가 된 아버지는 한없이 유치해져 버리고 만다. “나는 시험 성적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늘 떠들고 다니고 있긴 했지만 막상 딸아이의 시험지를 펼쳐 들었을 때 두 개, 세 개가 틀린 것을 확인하면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곤 했었다. 솔직히 말해 아비인 나는 국민학교 일 학년 때 백 점 이하를 맞아본 적이 없었다. 백이십 점이 만점이라면 나는 항상 백이십 점을 맞았을 것이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백 점이 만점이므로 언제나 백 점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빛나는 과거를 가졌던 나로서는….”

부아가 치민 아버지. 딸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서기로 했다. 어린 딸에게 “그렇게 공부를 안 하려면 일찌감치 바보 노릇이나 하라”고 다그치는 속물이 되고, 시험 공부에 일일이 간섭하고 노심초사 결과를 기다리는 새가슴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유치한 자신감에 차 있다. “이래봬도 명가정교사로 손꼽히던 내가 아니냐. 내 딸아이 반에 다니고 있는 경자와 수연이 아버지, 네놈들에게 다혜의 아버지인 내가 도전장을 보낸다.”

2 “자는 모습도 너무 예뻐 카메라를 들이대곤 했다”는 전몽각 선생과 딸 윤미.3 1965년 백일도 되기 전 윤미. 7 드디어 윤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제부터 공부, 공부, 할 테지.’ 아빠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듯 배짱 좋은 아버지지만 몸집이 작아 고민인 딸이 애처로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면서도 역시 유치한 장담을 빼놓지 않는다. “나는 믿고 있다. 아- 우리 딸 다혜는 키는 작겠지만 아주 날렵한 몸매를 가진 숙녀로 성장할 것이다. 성격이 밝고 명랑해서 친구들 간에 인기 있고… 그래서 서로 앞다투어 며느리 삼으려고 우리 집 대문에 쌀 배급 타듯 날마다 줄을 서게 될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
가족 간의 인간 관계 쉽지 않다. 남이라면 그냥 넘어갈 일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남이라면 대견할 일이 서운하기도 하다. 남보다 훨씬 사랑하는 건 맞는데, 왠지 남보다 훨씬 자주 싸운다.정이 넘쳐 더 매정해지기도 한다. 노모가 걷지도, 보지도 못하게 됐다. 대소변도 방 안에서 하신다니,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자주 찾아 뵙지 못한다.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게 아니라 어머니의 늙으신 모습과 죽음을 앞두신 모습이 보기에 마음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딸 부부에게 불고기와 냉면을 사준 날도 기분이 묘했다. 다 먹고 계산을 하자 딸이 “아빠, 잘 먹었습니다”라며 인사를 한다. ‘잘 먹었습니다’라니. “이런 말은 잘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신세를 졌을 때 하는 인사말인 것이다. 그러나 다혜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다혜는 내가 낳은 딸이며 지금껏 무엇을 먹거나 무엇을 사 주어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내 친딸이었던 것이다. …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시집을 가면 딸아이는 출가외인이 되어 남의 집 식구가 되어 버린다는 옛말대로 이미 남이 되어 버린 것일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말을 사용해 본 적이 없는데 어째서 딸아이는 그런 인사치레를 하는 것일까.”

시간은 앞으로만 간다
모든 가족 이야기엔 생로병사가 다 있다. 기쁘고 대견스럽고 서글프고 슬픈 사연들이 뒤섞여 있는 게 가족 이야기다. 4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 누구나 몸과 마음에 노화가 시작된다. 1990, 91년께 ‘가족’엔 작가의 그런 처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돋보기 안경을 쓰다니. 내가 할아버지들처럼 돋보기 안경을 쓰다니.” 신문을 볼 수 없을 만큼 눈이 나빠지면서도 내 눈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4 손바닥만 한 뒤뜰이 식구들의훌륭한 놀이터였다. 엄마는 윤미 동생 윤호를 안고, 윤미는 엄마를 따라 인형을 안았다. 5 아이들이 신나게 논 날. 피곤한 아이들의 잠자리는 거칠었다. 6 여덟 살쯤 된 윤미의 평범한 일상. .8 중학생이 된 윤미. 어느새 키가 엄마만큼 자랐다. 9 윤미 결혼식 날의 부녀. 사진작가 강운구씨가 찍었다

마음은 더 허전해진다. “아내도, 두 아이도 아빠인 나를 따돌리는 것만 같고 일부러 공모해서 저희들끼리만 맛있는 것 냠냠 숨어 먹고, 저희들끼리만 재미있는 얘기 몰래 몰래 하는 것 같아서 지난 이삼 년간 정말 외롭고 쓸쓸하였다. 이 좋은 집 지은 게 누군데, 저 자식들 지가 하고 싶은 대로 다하게 하고, 사고 싶은 옷 있으면 무엇이든 사주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다 사준 게 누군데, 이 아빠가 피땀으로 글을 써서 돈을 벌어 그런 것인데. 그 좋았던 청춘 시절 다 희생하고 헌신해서 이룬 결과인데, 이제 와서 이 자식들이 이 아비를 모른 체해. 하루 종일 2층에 있어도 와서 보지도 않을 만큼 관심도 없어. 좋다, 좋다구. 썅!”

절절히 공감하며 따라 읽던 독자들. 무심코 정신을 차려보면 의아해지기도 한다. 작가 최인호가 누구인가.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 최연소 신문 연재 소설가, 작품이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가다. 그리고 『별들의 고향』『겨울 나그네』『잃어버린 왕국』 『상도』 『해신』『유림』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쏟아낸 유명인사 아니던가. 돈도 벌 만큼 벌었을 테고, 명예도 쌓을 만큼 쌓았을 그에게 왜 ‘소시민’인 내가 공감하는가. 누구에게나 시간이 똑같이 흐른다는 게 이토록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조건이었던가.

그래서 가는 세월 속에서 작가가 잡아낸 인생의 깨달음에도 공감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이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가는 고난의 길이든 바다로 가는 고통의 여정이든 언젠가는 병에 가득 고기를 담아서 선생님이신 하느님한테로 돌아가는 어부의 길이니 그때까지는 ‘랄랄랄라랄랄랄라’하고 춤추며 노래해야지. 그리고 언젠가 헤어질 때는 ‘아안녕’이라고 인사를 해야지. 어차피 그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니까.”

전몽각 사진집 『윤미네 집』
『윤미네 집』(포토넷)은 성균관대 부총장을 지낸 고 전몽각(1931∼2006) 선생이 찍은 맏딸 윤미(46)씨의 성장 사진첩이다. 책의 부제대로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담고 있다. 초판본은 윤미씨가 결혼한 다음 해인 1990년 나왔다. 팔겠다 마음먹고 내놓은 책이 아니었다. 1000부 남짓 찍어 지인과 사진 동호인들이 오붓하게 나눠 보려니 했다. 하지만 입소문은 길었다. 『윤미네 집』을 구하기 위해 헌책방을 뒤지고, 사진 동호회 게시판에 ‘『윤미네 집』을 꼭 구하고 싶습니다’고 수소문하는 글을 남기는 사람이 많았다.

『윤미네 집』엔 아무 기교가 없다. “아이들의 일상생활은 보기에 따라서는 비슷하고 평범한 것 같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게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새롭고 독특하여 아무리 섬세한 예술가일지라도 연출로는 불가능한 그런 자체 표현을 수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손에 든 내가 이래라, 저래라 지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초판 머리말에서 알 수 있듯 연출도 없다. 한 아이가 태어나 엄마의 젖을 빨고 기다가 걷고 울고 웃고 놀고 공부하다 어느새 어른이 돼 또 한 가정을 이뤄 나가는 과정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감동은 크다. 20년 전 저자는 적었다. “공부방에 있다 보면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온 집안 가득했다. 그 소리에 이끌려 나도 몰래 아이들에게 달려가 함께 뒹굴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나는 이런 사람 사는 분위기를 먼 훗날 우리의 작은 전기(傳記)로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만 돌아오면 카메라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그 ‘사람 사는 분위기’의 생명력은 퍽 길다.

사진집을 복간한 출판사 ‘포토넷’ 최재균 대표는 “찌그러진 냄비에 밥을 나누어 먹고, 좁은 방 한 칸에서 모로 누워 잠을 청해도, 간혹 비치는 고단한 표정에까지 『윤미네 집』에는 늘 행복한 기운이 감돈다”고 했다. 바로 카메라 렌즈 너머 가족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먹먹한 부정(父情)의 힘이다.

20년 만에 복간되는 『윤미네 집』에는 초판본에 실렸던 사진 외에 전몽각 선생이 작고하기 전 췌장암으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상태에서 정리했던 ‘마이 와이프’ 사진과 원고가 덧붙여졌다. 손녀와 함께 거실에서 잠든 아내의 얼굴에서 “오래전 내가 알았던 사투리 심하고 수줍음 많던 갈래머리 여고생”의 모습을 읽어낸 남편의 시선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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