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야 박의 교과서를 덮어라] "아빠 힘들어, 반 좀 바꿔 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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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혼자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낸 김모씨는 거의 매일 아침 7시 무렵 딸의 국제전화를 받는다. 동부의 모 사립고등학교 2년생으로 1년3개월째 유학 중인 딸의 전화 첫마디는 언제나 "아빠! 나 힘들어"이다.

유학생활의 간단한 어려움도 버거워하는 딸의 최근 요구는 그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빠! 영어 강독 선생님이 나에게만 질문을 집중해 못살게 굴어. 유학 왔다고 차별하는 것 같아. 아빠 '빽'으로 영어선생님을 바꿔줘요. 아빠가 교장선생님에게 얘기해서 반을 바꿔주면 되잖아요." 자못 심각한 말투였다. 대기업 중역인 김씨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소에 부쳤지만, 어머니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힘쓸 수 있으면 해줘요. 자칫하면 아이 잡겠어요" 라고 거든다.

한국의 많은 조기 유학생은 이처럼 아주 사소한 어려움도 혼자 극복하지 못하고, 누구에게 의존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덩치만 크고, 생각은 나이에 못 미치니 말하자면 수퍼 베이비(super baby)들이다. 조기 유학생뿐 아니라 상당수 한국 학생들이 아직도 과잉보호의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상을 모르고 곱게 커 온 수퍼 베이비들이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는 '프로 매니저'를 자처한 일부 부모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르면 4~5세부터 과외와 학원에 맡겨 한국식 시험을 잘 치는 요령과 단편적인 지식을 정리해주는 데 주력해, 교과서 중심의 지식을 부드럽게 갈아서 아기들에게 마치 숟가락으로 떠먹여온 꼴이다. 여기에 너무 익숙해져 조금만 딱딱하고, 종합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제대로 된 문제에 부딪히면 스스로 지식을 씹어낼 수 있는 치아와 턱(의지)이 미성숙한 것이다.

미국 교육은 어떤가? 한마디로 냉혹한 결전장이다. 실력은 물론 적응력 있는 아이들은 교육 레벨을 올려 능력을 극대화할 기회를 주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조기 유학을 떠난 한국형 수퍼 베이비들이 부딪히는 현실이 바로 미국의 철저한 적자생존식 교육이다. 미국 중고교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가 스스로 공부할 자세와 의지가 없어 중도 탈락하거나 방황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국 부모들에게 조기 유학의 환상을 심어준 건 미디어의 영향도 크다. 가끔 언론에 보도되는 한국계 학생의 미 유명대학의 수석 입학.졸업이니, 백악관에 초청된 우수 고교생들은 거의 재미교포에 국한된 얘기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들을 조기 유학생으로 아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에서의 습성 때문에 미국 교육도 과외로 돌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어리석은 착각이다.

수퍼 베이비를 '세계 초원'을 누빌 인재로 키우기 위해선 학생들은 물론 한국 기성세대가 갖고 있는 교육에 관한 모든 고정관념을 모조리 털어내야 한다. 비단 조기 유학생뿐 아니라 한국의 학생들도 불과 몇 년 뒤 세계화한 이 땅에서 직면해야 할 과제다. 지금까지 학원과 과외에만 의지해 온 우리 자녀가 수퍼 베이비는 아닐까? 혹시 부모들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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